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국 프로젝트 Aug 17. 2019

그걸 (일개 6개월 캐주얼 직원인) 내가 결정해도 돼?

박앤비, 호주 조직문화 경험기 2 


Merlin에서 일하다 보면 ‘이런 게 가능하구나!’하고 여러 번 놀란다. 


한 번은, ‘내가 이런 결정을 내려도 되나’ 싶은 일이 있었다. mother’s day를 맞이해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무료입장 이벤트를 시행 중이었는데, 이때 정확하지 못한 안내 문구로 인해 많은 손님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당일만 하는 특별 이벤트로 이전 케이스가 없어 모든 항의가 당황스러웠던 와중에 동료 스태프가 내게 건넨 한마디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You need to make good decision”



이곳저곳 이력서를 넣을 때에 종종 보이던 문구,

협업도 잘하지만 혼자서도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 

혼자서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혼자서도 일을 잘 해낸다는 게, 정해진 대로 위에서 시키는 대로 매뉴얼에만 맞춰서 하라는 얘기인 줄 알았다. 내가 맡은 일이 1부터 10까지 있다면 그중에서 직접 선택하거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아주 기초단계인 1-2 정도, 그 외에는 물어봐서 시키는 대로 해왔으니까.


그 날이 가뜩이나 주말인 데다, 우리나라로 치면 어버이날에 해당하는 날이었던 터라 손님들은 물밀듯이 밀려오고 매번 슈퍼바이저나 매니저의 컨펌을 받기엔 그들의 수는 당연히 역부족이긴 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단순히 내 윗 상관의 일이 밀려서가 아니라 나의 능동적인 결정을 유도하고 지지한다는 것은 그동안 겪어온 일들과 달랐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데, 매 시간마다 매대에 음료와 제품들이 일렬종대로 잘 진열되어있는지 사진을 찍어 보낸다는 누구의 이야기와도 아주 대조적인 얘기다. 일개 캐주얼 말단 직원조차도 정해진 프로세스 안에서 큰 룰을 벗어나지 않는 선이라면 융통성 있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를 인정해주고 존중한다는 것이 Merlin에서 느낀 첫 번째 충격이었다. 


또 한 번은 ‘이렇게 정확하고 빠르게 사과를 한다고?’ 놀랬다. 관광지인 회사 특성상 직원들의 관련 신원 조회가 필수다. 때문에 이와 관련해서 매니저가 신원 조회 기한이 한참 지났다며 미처 하지 못한 사람들을 약간은 나무라는 듯한 단체 이메일을 보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신원조회는 우리 팀과는 무관한 것으로, 매니저의 실수였는데 소식이 들리자마자 매니저로부터 사과 이메일을 받았다. 무슨 연유로 오해를 하게 됐는지, 그리고 미안하다는 내용을 담은 사과는 매니저의 묵직한 책임 의식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단체 이메일을 통해 빠른 사실 정정과 그에 따른 가볍지만 진심이 담긴 사과 한마디, 내가 매니저를 잘 따르고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이 곳에서 일하다 보면, 내가 왜 국내 기업 공채를 안 하기로 마음먹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리님쯤 되는 매니저를 좋아해서 잘 따르고,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게 즐겁고 신나는 데 왜 국내 기업 공채는 안 하기로 했던 거였더라. 


1차 서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혹시 모를 필기 전형 준비를 위해 문제집을 풀면서 자꾸만 이런 생각을 했다. 중, 고, 대학교를 모두 크게 남들의 관심이나 일정 없이 조용히 살았는데(인정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내가 직장에 들어간다 해서 누군가 나를 인정하고 달라지는 날이 올까? 잘하면 반에서 3등을 했지 1등은 해본 적 없다. 경쟁에서 애매하게 중간 언저리에서 갈대처럼 있을 뿐, 1등 할 팔자는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니 마음이 편하다. 


그래, 안 해. 



아직도 경쟁하던 습관과 욕심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지만, 이제는 프로페셔널한 내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남들보다 뛰어나고 당장 매니저한테 인정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 자체로 일 인분을 할 수 있는, 
동료들을 지금보다 덜 귀찮게 하고, 
슈퍼바이저와 매니저들에게 서글서글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내가 되고 싶다. 














* 지난 저세상 조직문화 편과 이어지는 이 곳에서 어깨너머로 보며 느낀 직장생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의 단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차이는 있을 수 있으니, 그냥 '와 좋겠다'하고 봐주세요. ㅎㅎ 원래대로라면 지난 토요일에 업로드해야 했지만, 시드니에 갑자기 불어닥친 찬바람과 몸살 기운에 잠시 쉬었습니다. 앞으로 몸 관리 잘해서 주 1회 지속 업로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앤비 : 현재 호주 워홀 중으로 경험한 일이나, 이 곳 사람들은 어디서 놀고 뭐 먹고 지내는지에 관한 글을 씁니다. 마음은 여행 잡지 에디터지만, 막상 글을 완성해보면 '이런 일이 있었쪄요 우엥엥'하는 극 초보 레벨 1짜리 블로거에 가깝습니다. 매주 한편 올릴 예정이며, 앞으로 더 나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낮의 시드니 한복판에서 벌어진 무차별 칼부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