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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30. 2024

너는 오지 마

어떤 거절에 대하여

내가 초등학생 시절에 ‘생일 파티’란 엄청나게 큰 이벤트였다. 직접 초대장을 만들어 돌렸고, 키즈카페나 파티룸도 없었으니 장소는 크건 좁건 무조건 주인공의 집에서 이뤄졌다. 초대받은 아이들은 준비한 선물을 품에 안고 주인공의 집으로 향했다. 집이 아파트이건, 빌라이건, 크건 좁건,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케이크와 떡볶이, 김밥, 피자 등 먹음직스러운 음식에만 온 시선이 쏠렸다. 생일 파티를 끝내고 나면 모두 어른들의 간섭 없이 놀이터로 달려가 신나게 놀았다. 아! 매달 친구의 생일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일 파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매번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즐겁고 신나는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적이 있었다. “내 생일 파티에 꼭 와!” 친구가 나만 쏙 빼고 주변에 있는 아이들에게 초대장을 건넸다. 카드 앞면엔 색연필로 적힌 ‘초대합니다’라고 쓰여있었다. ‘나는 왜 안 줘?’ 하고 묻고 싶었지만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묻지 못했다. ‘어차피 나도 초대해도 안 갈 거야’, 하는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앉아 있었다. 나와 친하지 않아서, 나보다 공부를 못해서, 아니면 너무 잘해서, 사는 동네가 달라서. 초대하지 않은 이유는 다양하고 생일 주인공의 마음에 따른 것이니 서운해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파티에 가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외감으로 눈물이 났다. ‘누군가 나를 거부했다’라는 사실이 마음에 작은 생채기를 남겼다.    

 

유쾌하지도 않은 그 일이 갑자기 떠오른 건 ‘노키즈존’ 때문이었다, 유치원에 가지 않은 둘째와 모처럼 시간을 보내던 참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근처에 있는 맛있는 디저트 집에 가자고, 시안이가 좋아하는 과일 케이크를 먹자며 아이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했다. 오빠 없이 엄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게 된 아이는 맞잡은 팔을 휘두르며 ‘엄마랑 다이어트하니까 너무 좋다!’ 하며 폴짝폴짝 뛰었다. 이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건 다이어트가 아니고 데이트라고, 귀여운 오류를 고쳐주면서 내 마음도 함께 들떴다. 인터넷에 케이크 맛집이라고 소개된 카페는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진열대 안엔 망고 케이크가 먹음직스럽게 전시되어 있었다. 치즈 케이크도 하나 더 먹어야지. 들뜬 마음으로 주문을 했다.


“아메리카노 하나랑 망고 케이크, 치즈 케이크 하나씩이요. 먹고 갈게요.”

“죄송한데 저희가 노키즈존이라서요. 포장만 가능하세요.”

노키즈존? 아뿔싸! 내가 그곳에 들어오다니! 순간 얼굴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땐 노키즈존이란 소린 없었는데. 당황한 내 기색에 아르바이트생 역시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곁에 있던 아이가 나를 깨우듯 손을 흔들었다.

“엄마 안 사?”

머물 수 없다면 포장을 하는 게 맞지만 어쩐지 사고 싶지 않았다. 초대받지 못한 파티에 가고 싶지 않은 척 자존심을 부렸던 것처럼 되려 빳빳한 표정으로 ‘그럼 그냥 갈게요’ 하고 카페를 나왔다. 문을 나서며 반사적으로 내부를 돌아봤다. 안은 아이와 함께 가던 여느 카페와 다름없어 보였다. 사방에 위험한 물건 같은 건 없었다. 행여나 위험한 물건 때문에 노키즈존을 자처한 거라면 그건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위험한 것 아닐까. 그런 위험한 물건이 카페 내부에 있다면 나가야 할 건 아이가 아니라 그 물건이 되는 게 맞을 것이다.     


‘노키즈존’ 아, 얼마나 마법과도 같은 산뜻한 거절인지. ‘아이는 나가 주세요’라는 불편한 부탁을 ‘노키즈존’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손쉽게 해결했다. 그 단어 하나로 우리는 패잔병처럼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 온 아이는 “엄마! 케이크 먹어야지! 왜 그냥 나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카페에 케이크는 넉넉했고, 우리가 앉을 수 있는 좌석 수도 많았는데. 아무것도 사지 않고 그저 빈손으로 나와야 했던 이유를. 네가 아이라서 우리가 이곳에 있을 수 없대. 아이라서 거절당한 상황을 아무리 좋게 설명하려 해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앉아서 먹을 수가 없대.”

“왜?”

“여기 주인이 우린 초대하기가 싫은가 봐.”

아이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왜 싫은데?”

“음..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굴고, 카페 안에 물건을 함부로 다룰까 봐 걱정되어서.”

“난 조심조심 만지는데. 엄마가 만지지 말라고 하는 건 안 만져.”

“엄마는 시안이가 조심하는 거 잘 알지. 근데 카페 사장님은 시안이를 처음 보니까 잘 모르셔서 그래.”

“그럼 난 언제 갈 수 있어?”

물론 지금도 가능하지. 나는 이 대답을 해주고 싶었으나, 글쎄-하고 대답했다. 아이와 대화를 나누며 깨달았다. 아, 내가 이해시켜야 하는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카페 사장님인데.     


초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둔 아이는 식탁에 앉아 스스로 밥을 먹는다. 매운 건 아직 잘 먹진 못하지만, 어른들이 먹는 음식은 대부분 먹을 수 있다. 아이가 식당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작은 포크와 수저, 플라스틱 물컵뿐이다. 그리고 그전에 ‘환대’가 가장 필요하다. 아이를 데리고 가기에 번거로운 곳이 있을 순 있지만, 아이와 함께 갈 수 없는 곳, 가지 못하는 곳은 없다. 내 아이뿐만 아니라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기도, 엄마 품에 안겨 있을 수밖에 없는 아기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적극적으로 케어하지 않는 일부 부모들 때문에 노키즈존이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이가 울고불고 소리를 쳐도 그저 놔두는 부모들 때문이라고. 나도 안다. 아이의 울음이 어떻게 귀를 통과하는지. 아이의 울음소리는 대낮에 내리치는 벼락처럼 내가 있고자 하는 시간과 장소를 반으로 쪼개 놓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가 유아차에서 조금이라도 칭얼거리면 후다닥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뚝! 울지 마” 아이를 품에 안고 재우며, 나는 아이를 조용한 아기로, 침묵하는 아기로 만들었다. 남에게 내 아이의 울음소리로 피해를 주지 않는 것.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은 우는 아이를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아이라서 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아이의 미숙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세상 속 물건은 너무 크고 무겁다는걸, 그래서 조심하지만 실수한다는 것을. 그 실수를 통해 아이들이, 그리고 자신이 자랐다는 걸 잊곤 한다. 아이가 에티켓과 매너를 몸으로 배우기 전에 그들의 방문을 거절한다. 그저 ‘울지 마, 웃지 마, 서툴지 마, 뛰지 마’하며 아이를 이미 어른인 것처럼 바라보기만 한다. 멕시코에서 아이를 키우며 사는 지인에게 그곳에도 노키즈존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멕시코는 물론이고 자신이 여행했던 그 어떤 나라에서도 노키즈존을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래서 한국에 갈 때마다 괜히 눈치가 보이고 주눅이 든다고. 멕시코에 노키즈존이 없는 건 그곳 아이들이 내가 사는 이곳의 아이들과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을 환대하고 지지하는 어른들이 다른 것일까. ‘사람을 거절하는 곳’이 있는 세상. 나는 그 세상을 사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아줄 수밖에 없었다.     


<본 에세이는 웅진싱크빅 매거진 '엄마는 생각쟁이' 7월호에 수록된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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