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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Oct 16. 2024

우리가 머물렀던 작은 세계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온 지 1년이 되어갈 때까지, 작은방엔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남편과 매번 ‘언제 한 번 날을 잡고 저 방에 있는 물건들을 치우자’고 다짐만 했을 뿐, 막상 실행에 옮기자니 무엇부터 버리고 남겨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 이 복잡하고 난해한 ‘짐’이라는 산을 어떻게 정복해야 할까! 우리는 일단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을 처분하기로 했다. 쓸만한 것들은 이사를 오면서 지인들에게 물려준 터라 남아있는 장난감을 다시 가지고 논다고 해도 영 흥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팔 한쪽이 없는 사람 모양 레고, 이미 굳어버린 슬라임, 찌그러진 공, 화살을 전부 잃어버린 과녁판. 도대체 이런 건 왜 안 버리고 가져왔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쓰레기봉투 안을 재빠르게 채워갔다.     


손에 잡히는 건 모조리 쓰레기봉투에 넣다가 서랍 깊은 곳에서 첫째의 애착 인형이나 다름없었던 강아지 인형이 나왔다. 진작에 버린 줄 알았는데, 용케 여기에 있었구나! 깊은 곳에 오래 있어서 행색은 말이 아니었지만, 아이가 꼭 끌어안고 지내던 물건이라 그런지 오랜만에 육아 동지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냥 둘까, 하다가 그렇게 놔둔 결과가 지금 내 앞에 쓰레기 산을 만들었다! 생각이 들어 바로 정신을 차렸다.


“원상아! 이 인형 버려?”

거실에서 TV에 빠져 있던 아이가 내 물음에 목을 빼고 인형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어떤 고민이나 주저함 없이 바로 “응~ 버려!” 하고 대답했다. 내가 “버리지 말까?” 하고 물었더라면 TV에 넋이 나간 아이는 아마 “응~ 버리지 마!” 하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이의 대답에 강아지 인형을 곧바로 쓰레기봉투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이는 시선을 거두고 바로 TV에 다시 빠져버렸지만 나는 자꾸 불투명한 봉투 속에 찌그러진 인형의 형체에 눈길이 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 있나요!’ 무표정한 강아지 인형의 표정이 왠지 서글퍼 보이기까지 했다. ‘나도 네가 버려질 줄은 몰랐단다.’ 그 표정에 내가 어떤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인형을 토토라고 불렀다. 내가 ‘인형은 어디 갔어?’하고 물으면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아이가 ‘인형 아니고 토토야’하며 내 말을 정정하곤 했다. 토토는 아이가 만 3살이 되었을 무렵에 우리 집으로 왔다. (왔다-라기보다 충동적으로 마트에서 구매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비록 마트에서 사 온 일개 인형일 뿐이었지만, 아이는 토토를 알뜰히 살폈다. 여행을 가게 되면 자신의 가방에 꼭 토토를 챙겼다. 토토의 까만 눈동자엔 바다와 산, 꽃과 밤이 고스란히 담겼다.      


나는 토토에게 진 빚이 많았다. 아이와 노는 일이 너무 따분하고 재미없고 지치고 힘들 때면 늘 토토를 소환했다. 

“원상아, 이거 토토 줘. 토토야~ 먹어봐~ 해.”

아이가 플라스틱 숟가락에 밥이라며 레고 조각을 얹어 가져오면, 나는 그 진수성찬을 토토에게 넘겼다. 아이는 내 말에 “토토야~ 밥 먹자” 하며 곧장 작은 방으로 달려갔다. 토토가 맛없는 플라스틱을 먹는 동안 나는 잠시나마 쉴 수 있었다. 아이는 일곱 살이 될 때까지 토토와 함께 잤다. 아이는 잠들기 전, 자신의 배게 옆에 토토를 눕히고 꼼꼼하게 이불까지 덮어줬다.

“토토야, 잘 자.”

나와 남편에게 토토는 무더기로 쌓여 있던 인형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아이에겐 단순한 인형이 아닌 함께 여행을 가고 같이 잠을 자는 강아지 모양을 한 친구였다. 눈을 꼭 감은 아이 옆에 까만 눈을 반짝이며 누워 있는 토토. 이 작은 강아지 인형이 마치 아이의 길고 긴 밤을 지켜줄 것만 같아서 웃음이 났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안에서 따스한 불빛의 스위치가 딸깍- 켜지는 게 느껴졌다.     


아직 세상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과 씨름하듯 하루를 보내고 나면 몸속 곳곳에 한숨이 들이치곤 했다. 자동으로, 습관처럼 한숨이 나오던 그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리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동심’이었다. 거실 구석에 작은 손수건을 덥고 누워 있는 인형을 보았을 때나, 대일밴드를 붙이고 해맑게 웃고 있는 버스 장난감을 보았을 때, 빈 반찬 통을 열었는데 안에 과일 장난감이 들어있을 때.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웃고 말았다. 아이가 건네는 위로는 그런 식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힘내란 말도 제스처도 없이. 포옹이나 눈빛도 없이. 그저 날 순순히 웃게 했다.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그것들과 대화했을까. 아이는 세상 속 입이 없는 것들에 열심히 입을 달아주었다. 아직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항상 서 있는 나무의 고단함을, 어딘가 바쁘게 이동하는 개미들의 부지런함을, 자동차 밑에 숨은 고양이의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의 가방에 달려 흔들리는 인형의 혼란 같은 것을 보았다. 서 있느라 힘들지? 개미야 정말 잘하는구나, 고양이야 괜찮아?, 인형들아 참 어지럽겠다! 아이는 세상 속에 끊임없이 말을 건네며 어른들은 들을 수 없는 대답을 들었다.     


동심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발음해 본다. 입술이 동그랗게 모여 동-하고 울림소리를 내는 귀여운 단어. ‘어린아이의 마음’ 이란 뜻을 가진 고운 단어. ‘동심’이라고 발음할수록 아이들이 내뿜는 동그랗고 커다란 빛이 눈앞에 형형히 보이는 듯하다. 나는 동그랗고 커다랗고 따뜻한 아이들의 마음에 기대어 한 시절을 보냈다. 오래도록 그 시절에 머물고 싶어서 자꾸만 산타 할아버지의 행적을 의심하는 아이에게 거짓말로 산타 할아버지의 일과를 둘러대고, 아이가 처음으로 치아를 뽑았던 날엔 치아 요정인 척 왼손으로 편지를 썼다. 그런 내 모습이 웃겨서 실소가 터졌지만, 이 순간이 조금만 더 더디게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언제까지 어린아이 일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이 세계에 더 머물고 싶다 해도 아이는 ‘성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한 발씩 동심의 세계에서 멀어졌다. 


아이는 이제 길가에 버려진 인형을 걱정하지 않는다. 나무에게 안부를 묻지 않고 뜻 없이 빙그르르 돌아가는 장난감에도 웃지 않는다. 더는 입이 없는 것과 대화하지 않고, 눈이 없는 것과 마주하지 않는다. 아이의 성장은 인형에 영혼이 빠져나가고 나무는 굳게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인형은 그저 인형이 되었고, 나무는 그저 나무가 되는 것. 구름과 나무, 새와 돌, 개미와 장수풍뎅이, 버스와 오토바이, 꽃과 도토리...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시절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     


아장아장 걷다가 저만치 날아가는 새를 보고 손을 흔들었던 시절. 세상이 온통 물음표로 가득해 자꾸만 왜? 하고 묻던 날들. 스치는 것 모두가 생생히 살아 있어 자꾸만 안부를 묻고, 이름을 묻고 싶었던 그때가 우리에게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곁을 지나는 이름 모를 무표정한 사람들이 귀하게 보인다. 그들의 등 뒤로 둥그렇고 커다란, 따스한 빛이 보이는 것 같다. ‘동-심’ 나는 아주 오랜만에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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