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Mar 27. 2024

나는 외롭고 싶다


내 생일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핸드폰을 보던 남편이 입을 열었다. 

“자기 생일에 여기 어때?”

남편이 건넨 핸드폰 속에는 근사한 호텔 전경이 담겨 있었다. 

“월요일에 나 월차 쓰려고. 토, 일, 월 다녀오면 좋을 것 같은데.”

“그래. 그것도 좋고.”

아이들이 놀기 좋은 수영장도 있고, 호텔 근처에 맛집도 있다고 하니 다녀오면 딱 좋겠다 싶었지만, 이상하게 내 마음은 그러거나, 말 거나였다. 뜨뜻미지근한 내 반응에 남편이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아니면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갖고 싶은 거나.”

남편의 말에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결혼 후 한 달 만에 잃어버렸던 웨딩 링을 다시 사달라고 할까. 아니면 그냥 봄옷이나 한 벌 사 입을까. 남편이 보여 준 호텔도 나쁘진 않은데. 비싸긴 해도 생일이니까.. 내 머릿속엔 그동안 가지고 싶었던 물건과 가고 싶었던 장소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뭔가 모르게 이것도 저것도 다 귀찮고 하찮게 느껴졌다. 

“에이. 생일 그거 뭐라고. 그냥 아무거나 해. 아무거나.”

“엄마! 아빠! 뭐 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실에서 놀던 아이들이 방으로 달려와 남편과 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묵직한 아이의 무게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원상아, 엄마가 뛰지 말랬...”

“엄마, 시안이 좀 혼내줘. 자꾸 내가 하는 거 방해해!”

“아니, 내가 먼저 가지고 놀던 거야.”

첫째의 말에 둘째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내 말이 껴들 사이가 없이 또 둘이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어휴 시끄러워.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올 1월과 2월 내내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두 아이가 함께하며 울고 웃는, 징징거리는, 짜증 내는, 소리 지르는, 깔깔 웃는, 한숨 쉬는 모든 소리를 들었다. 방학 내내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조용히 해’였다. 언젠가 방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을 말리다가 진짜 이 소리가 시끄러운 게 맞는지, 내 청각이 예민해서 별소리도 아닌 것에 발끈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났는데 귀가 너무 아프고 먹먹해서 병원에 갔다. 안 그래도 환자 많은 이비인후과에 애들을 데리고 가기 찝찝해서 만화를 틀어주고 절대로 문 열지 말고, 가스 가까이 가지 말고 만화만 보라고 열 번 넘게 말했다. ‘절대’로 시작해서 ‘절대’로 끝나는 당부를 한참 하고 난 뒤 집에서 나왔다. 내 귓속을 진찰하던 의사 선생님이 도대체 뭘 했냐고 물어보셨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선생님과 나는 서로 답을 요구하는 얼굴로 마주 봤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고막에 물이 찰 리가 있나. 의사 선생님은 분명 내가 뭔가를 했을 거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고, 나는 억울한 심정으로 치료를 마쳤다.

약국에서 약을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 고막에 물이 차서 먹먹하고 귀가 안 들렸을 거라는 설명을 곱씹으며 내 몸이 스스로 소리를 차단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뚱딴지같은 생각을 했다. 집에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카페에 들러 커피까지 사 들고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 동안 아이들이 내게 징징거린 것처럼, 남편 얼굴을 마주하면 자동으로 한탄이 흘러나왔다. 하루 종일 너무 시끄러웠어. 애들이 맨날 싸워. 둘 중에 한 명만 시댁에 잠시 보내 놓을까? 꼭 헨젤과 그레텔 속 새엄마처럼 남편에게 애들 흉을 봤다. 

"어휴. 그냥 나 혼자 어디 절 같은 곳 가서 묵언 수행이나 했으면 좋겠네.”

“자기는 절에 가면 1시간도 못 있을걸? 와이파이 안 잡힌다고 울면서 내려올 듯.”

“뭔 소리야. 요즘 절에 와이파이 다 터져.”

그런 말을 하며 남편과 나는 끌끌 웃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면 절 계신 스님의 마음이 되었다. 아, 애들이랑 하는 대화나 어른이랑 나누는 대화나 별 반 다를 게 없구나... 마음에 평화가 온 것도 잠시, 귀에 바로 아이들의 투닥거리는 목소리가 꽂혔다. 

“으아! 여보. 나 외롭고 싶다. 정말 외롭고 싶다고!"

외로운 게 뭐냐고. 고독과 고요가 무엇이었느냐고 남편 멱살을 잡는 시늉을 하며 매달렸다. 나의 절규에 아이들은 재밌는 게임을 하는 줄 알고 또 달려왔다. 

“나도 매달릴래! 나도!”

생일을 며칠 안 남기고, 아직도 어디서 뭘 할지 몰라 예약도 하지 않고 있었다. 멀리 놀러 가기엔 숙소도 없고, 그냥 근처에서 맛있는 밥이나 먹자 결론이 난 순간, 남편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 

“그럼 이번에 자기 혼자 어디 좀 다녀올래?”

‘혼자’라는 말에 닫혀있던 귀가 벌컥 열렸다. 어디 귀뿐일까, 원래 뜨고 있던 눈까지 번쩍 뜨였다. 

“혼자? 나 혼자?”

“응. 혼자 어디 가서 책 읽고 글도 쓰고 와.”

“자기 괜찮겠어?”

“애들도 다 컸는데 뭐. 나도 자기 워크숍 갔다고 생각할게.”

꺄울!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고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연기하며 숙박 앱을 열었다. 나 홀로 2박 3일. 꿈같은 휴가가 시작되었다. 

드르륵, 드르륵. 이른 아침부터 캐리어 끄는 소리가 동네를 깨우는 듯했다. 체크인은 3시였는데 기어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숙소 1층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면 된다고. 읽을 책과 노트북,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싸서 동대문으로 향했다. 숙소의 이름은 맹그로브 동대문. 마음이 들떠서였는지, 이름도 귀엽게 느껴졌다. 1인실과 2인실, 6인실로 공간이 나뉜 이곳은 잠깐 왔다 떠나는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장기 투숙객도 많은 것 같았다. 따로 세탁실과 공용 주방이 있었고 예약 시 쓸 수 있는 작은 헬스장과 요가실, 영화관도 있었다. 가만 보니 신식 대학교 기숙사 같기도 했다. 1층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3시가 되어 배정받은 8층 방으로 올라갔다. 1층부터 8층으로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설레고 두근거리던지. 이렇게 좋아도 되나. 이렇게 좋았다는 걸 알면 남편과 아이들이 섭섭해할 텐데. 나는 엘리베이터의 거울을 보며 벌렁거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약 5평 남짓한 공간에 싱글 침대와 작은 책상, 화장대, 옷장이 있었다. 창문 커튼을 열자 멀리 남산타워가 보였다. 한참 넋을 놓고 남산타워를 바라보다가 곧바로 원래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처럼 노트북과 화장품, 옷가지들을 세팅했다. 집에서 따로 챙겨 온 노트북 거치대와 무선 키보드까지 책상 위에 올려두고, 화장실에 세면도구까지 가져다 놓으니 빵빵했던 캐리어가 텅 비었다. 옷 몇 가지가 걸린 옷장, 간단한 기초화장품이 놓인 화장대. 노트북과 책이 올려진 책상. 흰색 이불과 베개. 낯설었던 방이 순식간에 원래 내 공간처럼 익숙하게 가다 왔다. 마치 오랜 시간 나를 기다린 나의 방인 것처럼.

“아이고, 좋다.”

흰색 시트 위에 그대로 몸을 뉘었다. 시계도 없는 곳.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결혼 후 밖에서 혼자 자는 게 처음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자취를 해봤거나, 기숙사 생활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어떤 공간에서 혼자 잠을 자는 게 내겐 낯설고도 특별한 이벤트였다. 팔을 쭉 뻗어 머리맡 선반에 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산책과 음악> 세모꼴로 접어 둔 페이지를 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인생은 짧은 것.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은 더울 짧은 것. 그러니 타인의 옷을 입고 타인의 꿈을 꾸고 타인의 인정을 구하려고 애쓰는 대신 제 존재의 타고난 빛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 누구도 보지 않는 혼자만의 방에서도 오롯이 자족하면서. 흰 바람벽을 마주 보면서. (...) 그리하여 어느 날 우리 빛나는 얼굴로 만날 수 있기를.”

저녁에 먹을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와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건물 바로 옆에 가까운 편의점이 있었지만, 좀 더 걷고 싶은 마음에 길을 건너야 하는 편의점으로 갔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건물들에 걸린 간판을 훑었다. 여행자의 마음이 되어 한글이 빼곡한 간판을 그림 보듯 지나쳤다. 비닐봉지에 가득 저녁거리와 간식을 사서 돌아와 남산타워를 보며 먹었다. ‘빨리 먹어’라는 말이 없는 저녁. 내가 움직일 때만 바스락 소리가 나는 침대 시트. 아무도 나를 부를 리 없는 길고 긴 밤. 이 공간에 혼자 살아 움직이는 것은 나뿐이었다. 옷장과 침대, 화장대와 책상이 고요히 나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잠들기 전, 좁은 욕실에서 야무지게 샤워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알록달록한 색종이와 풀과 색연필이 한가득 놓여있는 탁자가 아닌, 먹다 남은 밥풀이 뒹구는 식탁이 아닌 앉아서 공부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기 위해 존재하는 책상. 나는 그런 책상에 참으로 오랜만에 앉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책상 위를 쓸어보았다. 과연 좋은 글이 나오리라 장담할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쓴 글을, 읽은 책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나는 키보드에 올린 손을 서서히 움직였다. 

‘나는 외롭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