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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13. 2024

우리 집 '주부'에 대하여 (2)

당신 댁 '주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2편


 이 집에 낙하산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캡슐로 커피를 내리는 커피머신기 역시 낙하산이었지만, 제품들은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해외파였다. 한 번은 그가 등장하는 광고를 본 적이 있었는데, 무려 할리우드 배우와 함께였다. 모든 제품들이 광고 속에서 그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까만 몸의 그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한 번은 곁에 있는 에어프라이어가 그에게 말을 건넸는데 그는 “what???” 하며 도통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안을 줬다. 그 이후 제품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낙하산임에도 다른 제품들이 그를 무시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주부의 말 때문이기도 했다. 


“와. 이거 너무 좋다. 제값 주고도 샀었겠다.” 


주부가 남편에게 그 말을 내뱉자 제품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전류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그 기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부러움과 질투심. 한 번도 자신을 향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던 주부가 겨우 커피 내리는 머신을 보고 그런 찬사를 하다니. 할인이 없이도 제값을 주고도 샀었겠다니. 자신을 구매할 땐 카드 할인이며, 쿠폰이며 가장 싸게 파는 곳을 찾고 또 찾아 결제했으면서. 매일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우리들에겐 한 번도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던 주부가 커피 내리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는 저 외국 놈에게 그런 찬사를 보내다니. 주부는 매번 그 커피머신을 쓸 때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먼지를 쓸어내리곤 했고, 어디가 흠이 난 곳은 없는지 이리저리 살피곤 했다. 밥솥의 불만이 커피머신이 온 이후부터 부쩍 심해진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커피머신 가장 큰 매력은 향을 낼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것 또한 밥솥도 (단호박 밥을 짓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백미만 짓는 주부가 야속하기만 한 것이었다.


물걸레 청소기는 쿵쿵 소리를 내며 살짝 열린 옷방으로 들어갔다. 


“저거.. 저거 또 오버하지.”

느긋하게 충천을 즐기던 로봇청소기가 이곳저곳 꼼꼼히 먼지를 닦아내는 그의 모습에 괜히 툴툴거렸다. 아까 주부가 내뱉은 말이 내심 마음에 걸리는 듯 보였다.


“뭐~ 나는 당근 당해도 상관없어~ 이직도 괜찮지! 평생 이 집에서 일만 하다 고물상으로 갈 순 없잖아! 다른 집도 가보고 해야지! 다른 집 주부가 이 집 주부보다 나을걸? 맨날 커피 뽑아 먹고 책이나 보고 노트북이나 두드리고..”


“음식은 뭐 하긴 해? 맨날 외주 맡기는 주제에 반찬 오면 짜네, 다네, 어쩌네~ 그럼 자기가 하든가~”

밥솥이 이때다 싶어 말을 보탰다. 


“주부 손은 노트북 두드릴 줄 밖에 몰라요~ 오늘 또 어딜 가서 뭘 했나 몰라~”

밥솥의 말에 모든 제품들이 깔깔깔 웃었다. 입에 빨래를 가득 문 건조기에 컥컥컥 하면서 웃음소리를 냈다.


“저.. 듣고 있기 매우 언짢네요.”


느닷없는 목소리에 웃음소리는 잘려나간 듯 뚝 끊겼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까 주부가 아일랜드 식탁 위에 두고 간 노트북이었다.


“말씀하시는 주부가.. 작가님을 칭하는 것 같은데..”

“작..작가요? 주부가 작가라고요?”


노트북 입에서 나온 작가라는 호칭에 정수기가 몸속으로 물을 꿀떡 흘려보내며 더듬거렸다. 


“아..네. 뭐 딱 ‘작가’라고 할 순 없지만.. ‘작가지망생’이라고 칭하면 좋겠네요.”

제품들은 노트북의 말에 잠시 말을 잃고 멍한 상태가 되었다. 작가 지망생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애 엄마가 일 안 하면 주부지..지망생은 또 뭡니까?”

내 필터를 읽기라도 했는지 정수기가 노트북에게 말했다. 제품들이 노트북의 다음 말에 집중한 듯 집 안이 고요해졌다.


“음.. 글쎄요.. 그렇지만 저와 있을 때 그녀는 한 번도 주부인 적이 없었어요. 항상 글을 쓰고 있었으니까요.”

 노트북은 오히려 주부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다는 듯 말했다. 노트북의 말에 제품들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 것 같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글을 쓴다라. 주부가 우리를 쓸 땐 늘 주부였다.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는. 주부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본 적 없는 제품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 주부도 회사원일 때가 있었지. 화장하고 옷을 차려입고 애들한테 인사하고 제일 먼저 이 집을 나선 적이 있었어.”


 냉장고의 늙은 목소리에 저마다 정신을 차린 듯 냉장고를 바라보았다. 주부에게도 그런 적이 있었지. 나도 그때가 불현듯 떠올랐다. ‘엄마 다녀올게-’ 이 집을 가장 먼저 나서며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던 주부의 모습이. 한때 우리는 그녀를 워킹맘이라고 불렀었다. 워킹맘이 아닌 지금의 그녀는.. 주부지. 작가지망생이라는 호칭은 또 뭘까.


“그녀가 좋아하는 건.. 책..이예요..”

옷방에서 나온 물걸레 청소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든 제품의 시선이 물걸레 청소기에 닿았다. 그는 흠흠 하고 목소리를 다듬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가.. 옷방에서.. 다 봤어요. 엄청나게 큰.. 책장을요..”

우리 중 그 책장을 본 제품은 청소기들 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말을 잊은 채 엄청나게 큰 책장에 대해 상상했다. 


"아니, 그냥 네모난 종이 같은 게 많이 꽂혀 있는 거야. 별것도 아니구먼 주부는 왜 저런담."

로봇청소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로봇청소기가 내뱉는 말은 신뢰를 잃고 있었다. 아무도 가보지도, 가볼 수도 없는 옷방에 놓인 책장을. 예전, 좁은 집에 큰 책장이 짐이 된다며 버리자는 남편을 겨우 말리던 주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안돼. 내가 제일 아끼는 거야.” 그때 제품들은 도대체 책장이 뭐길래 저러느냐며 늦은 밤마다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왓? 오 마이 갓! 노! 주부스~ 페이보릿 잇츠 미!”

잠자코 있던 커피머신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울먹였다. 오!마이 주부! 를 몇 번 외치더니 끝내는 ‘오!노!~ 내가 최애 제품인데에~’ 하며 울부짖었다.


“저거 저거.. 다 알아 들었으면서 그동안 못 알아듣는 척한 거 봐.”

밥솥이 울부짖는 커피머신을 향해 낮게 중얼거렸다. 옆에 있는 에어프라이어가 뭐라 뭐라 그를 달랬지만 그의 울음소리는 더 커질 뿐이었다. 


"그.. 주부가 무슨 글을 쓴다는 겁니까?"

내가 노트북을 향해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쓰고 있는 것이냐고. 청소와 빨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미루고 그녀가 쓰고 있는 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고. 내 말에 노트북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원래 주인이 있는 것이라.. 제가 함부로 읽어드릴 순 없지만... 여러분이 원하신다니 딱 한 문장만 읽어 드리죠."


꿀꺽. 집 안의 모든 제품들이 숨을 죽인 채 노트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고요한 거실이 창밖으로 들어온 오후의 햇살로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아, 아까 적은 마지막 문장이 여기에 있네요... '처음으로 그녀가 쓰는 글이 궁금해지는 밤이었다.'"


노트북의 목소리가 뚝 끊기고, 제품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이야, 무슨 지망생이라더니 글도 딱 그 수준이네, 조금 읽고 뭘 알 수가 있겠나. 딱 한 줄짜리 문장이었는데도 다들 한 마디씩 감상평을 남겼다.  


주부가 현관 비밀번호를 치는 소리가 들리자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주부는 그날도 늦은 밤이 돼서야 설거지를 시작했다. 나는 설거지를 하는 주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설거지와 빨래 개는 걸 미루고 밥도 백미밖에 할 줄 모르는 주부. 커피는 좋아하고 책은 사랑하는 주부. 한때는 워킹맘이었다가 지금은 글을 쓰는.. (노트북 말로는) 지망생이 된 주부. 우리가 본 적 없는 옷방 속 책장처럼 우리가 보지 못한 주부의 다른 모습은 얼마나 많을까.


설거지를 다 끝낸 주부는 커피머신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았다. 평소엔 쪼르륵- 잘 나오던 커피 줄기가 오늘따라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주부는 커피잔 속 커피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부는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자판 소리가 경쾌하게 흘렀다. 제품들 모두가 노트북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 같았다. 처음으로 그녀가 쓰는 글이 궁금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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