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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Feb 14. 2024

우리 집 '주부'에 대하여 (1)

당신 댁 '주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1편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선 이른 아침, 주부는 줄자를 들고 한참이나 주방을 배회했다. 가로, 세로, 높이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몇 번을 재 보더니 영 각이 안 나오는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쩝. 주부는 입맛을 다시곤 노트북이 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덜컹- 현관문이 닫히자 집엔 깊은 정적이 흘렀다.     

현관 쪽을 배회하던 미세먼지가 거실로 들어왔다. 나는 얼른 미세먼지를 빨아들이곤 내 안에서 재생산된 신선한 공기를 내뿜었다. 사람이 있건 없건 이게 나의 일이었다. 조용했던 집 안이 내 들숨, 날숨소리로 채워졌다.     

“쉬엄쉬엄해. 보는 사람도 없는데.”


로봇청소기가 내 앞을 지나가며 말을 건넸다. 로봇청소기가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먼지를 빨아들이는 게 아니라 요리조리 피해 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현관까지 쓱 같다가 바로 충전기 쪽으로 돌아갔다. 저기에 바로 먼지가 그대로 있는데! 한마디 할까 하다가 말았다. 로봇청소기는 알까. 주부가 며칠 전 당근 앱을 켜서 ‘로봇청소기’를 검색했다는 걸. 주부는 로봇청소기를 당근에 내다 팔 생각인 것 같다.    

 

“아마도 식기세척기를 채용하려고 하는 거 같지?” 

잠자코 있던 정수기가 입을 열었다.      


“참나- 그깟 설거지 얼마나 된다고 이 좁은 곳에 식기세척기 채용할 생각을 해?” 

밥솥은 오늘도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식기세척기가 주방에 채용된다면 주방에서 자리를 빼야 할 1순위는 밥솥이었다. 밥솥이 있는 자리에 식기세척기가 오면, 밥솥은 주방 옆에 딸린 아일랜드 식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될 것이다. 밥솥은 그게 불만이었다. 주방의 꽃은 밥솥인 본인인데, 그런 자신이 식기세척기에 자리를 빼앗겨 아일랜드 식탁으로 쫓겨나야 한다니. 치욕도 그런 치욕이 없었다. 밥솥의 불만은 계속 이어졌다.      

“하여간 이 집 주부는 뭐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밥도 허구한 날 백미! 그놈의 백미만 주구장창 하고 있잖아! 봐! 내가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어? 잡곡밥, 콩밥, 현미밥에 이유식, 죽!! 거기다 무압취사까지 된다고 내가!!”     

밥솥은 금방이라도 김을 내뿜을 것처럼 흥분해서 말을 이었다. 하긴. 밥솥은 여러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집의 주부는 매번 백미만 지어댔다. 이 집에 있는 가전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 언어를 쓰는 능력 있는 제품인데도 결과물은 그저 흰쌀밥이었다.      


“내가 TV 광고에도 나왔던 제품인데.. 다른 집 갔었으면 내 능력 인정받았을 거라고!”

밥솥은 사람 언어를 쓸 땐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투로 말했지만, 우리끼리 대화할 때는 영락없는 ‘나 때는 말이야~’를 찾는 부장님 같았다. 여기 TV 광고 한 번 안 나온 제품이 어디 있다고.. 나 역시 광고에 나왔던 제품이다. 그것도 잘 나가는 슈퍼 아이돌들과 함께. 하지만 나는 이 집에 계약직 제품에 불과하다. 계약 기간은 3년. 3년 이후에 내가 계속 이 집에 남아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내가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주부는 살짝 놀라는 말투로 ‘우리 집에 있기엔 좀 크네’ 하고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아, 이 집에 개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개와 고양이 털을 빨아들이는 내 능력을 맘껏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난 주부가 집에 있거나 없거나 뚜껑을 위, 아래로 움직이며 더 열심히 일했다. 끝내는 ‘아휴 시끄러워.’ 하는 소리를 들으며 무음 모드를 눌리곤 했지만. 

    

“걱정마러. 여기 딱히 둘 곳도 없어.”

정수기가 밥솥을 위로하듯 말했다. 정수기는 물을 연결해야 했기에 지금 있는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정수기 역시 계약직 사원이었다. 언제 얼음 정수기에 자리를 빼앗길지 알 수 없었다. 특히나 여름이 다가오면 주부의 남편은 ‘얼음 정수기로 바꿀까?’ 하는 말을 해서 정수기를 긴장시키곤 했다.

      

“어휴, 저 설거지 좀 보라고. 나갈 시간 있으면 저거나 좀 치우고 나가지. 쯧.”

싱크대엔 밥풀이 눌어붙은 그릇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어제저녁과 오늘 아침, 4인 가족이 만든 설거지였다. 그때그때 바로 설거지를 마치면 저렇게까지 쌓일 일이 없는데 주부는 늘 설거지를 미루곤 했다. 바로 뒤 싱크대에 설거지가 산처럼 쌓여 있음에도 주부는 커피를 뽑아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도 아니면 노트북으로 뭔가를 계속 쓰곤 했다. 하루에 한 번만 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설거지가 등 뒤에 쌓여 있어도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며 미루고 또 미뤘다.

      

“즈브는 나강거에여?”

베란다 쪽에서 빨래 건조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에 빨래를 가득 문 것 같았다.  

   

“뭐야! 건조기! 아직도 빨래 물고 있어?”

“에..느을 그러체 머..”

빨래 건조기가 체념한 듯 말했다. 분명 빨래 건조기는 어제 늦게까지 야근을 했는데.. 아.. 주부는 아침에 건조기에 든 빨래도 꺼내지 않고 외출을 한 것이다. 주부는 설거지뿐 아니라 빨래 정돈도 미루곤 했다. 한 번은 빨래를 개다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 빨래 개 주는 기계 나왔으면 좋겠다.’하. 이 주부.. 보통이 아니다. 나는 주부의 게으름에 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주부는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둘째 아이와 함께였다. “얼른 손 씻어.” 주부는 화장실에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먼지를 발견했다.


“아. 뭐야. 청소가 하나도 안 되네.”

주부는 짜증이 서린 얼굴로 로봇청소기 먼지통을 확인했다. 먼지통엔 머리카락만 몇 개 있을 뿐이었다. 로봇청소기는 민망한지 전원이 아예 off 된 것 마냥 자는 척했다. 주부는 하는 수 없이 무선 청소기로 바닥을 훑었다. 무선 청소기는 힘 있게 먼지들을 빨아들이며 역시 청소는 나밖에 없다는 듯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였다. 청소기를 다 돌린 주부는 물걸레 청소기에 전원을 켜고 노트북은 놔둔 채 둘째와 집을 나섰다.

     

“도서관에서 뭐 빌리고 싶어?”

“나는 마녀 위니!”

현관문 사이로 멀어져 가는 아이와 주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미세먼지를 빨아들였다. 그때 주부가 막 돌려놓은 물걸레 청소기가 내게 다가왔다. 


“요즘 미세먼지가 많아서 바쁘시죠?”

“아.. 네..”

“아까 저쪽 베란다 앞을 닦는데, 세상에 먼지가 말도 못 하게 많더라고요.”

그는 열심히 원형 다리를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짧게 예-하고 대답하고는 괜히 딴청을 피웠다. 물걸레 청소기는 내 앞을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다가 주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

그의 인사에 밥솥과 정수기, 냉장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건만 살짝 민망해진 그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 바닥을 닦는데 열중했다. 이곳 제품들은 물걸레 청소기를 보란 듯이 무시하고 있었다. 그는 결제를 통해 정식 채용이 된 제품이 아닌, 누군가의 선물로 이 집에 들어온 낙하산이었기 때문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공짜 선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제품들의 무시를 받았다. 하지만 제품들이 그러는 데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중소기업 제품이었다. 한 번 들으면 네? 어디요? 하고 되묻게 되는 회사제품. TV 광고 같은 건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제품. 삼성, LG, SK 같은 대기업 출신들 사이에서 방바닥을 누비고 있는 그의 행색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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