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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29. 2024

40대 부부, 직장 때려치우고 장기 여행족되다

무모한 도전의 계기_아내&남편의 이야기

내일이면, 모든 짐을 다 팔고·버리고·나누고 제주도로 온 지 딱 일주일이 됩니다.


어젯밤 남편에게 "우리 일주일 전만 해도 서울에 있었네." 이야기를 꺼냈다가 본인이 한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겨우 1주일?! 놀랍고, 신기하고, 시간을 번 것 같은 기쁨이 일었습니다.


뇌는 익숙한 것에 굳이 세포와 저장창고를 써서 인식하지 않으나 새로운 자극에는 그러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 경험, 만남을 가지면 그 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지는 것도 어렸을 때 비해 새로운 것이 상대적으로 덜해졌기 때문이지요.


시간이 40Km/h로 지나간다는 40대를 살고 있지만, 2년간은 속도를 줄여 시간을 늘려 써보려 합니다.

앞으로 매주 목요일, 부부가 직장 그만두고 2년간 국내 해외 한달살기 하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왜 기어 나가려는 거야? 아내의 이야기      


2015년, 30대였던 나는 혈액암(급성백혈병)에 걸려 치열하게 투병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문득 ‘다행이다. 작년에 크로아티아로 여행 다녀와서...’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급성백혈병은 항암, 전신 방사선, 조혈모세포이식술로 치료가 진행되는데, 이식 후에도 부작용(숙주 반응)으로 길게 고생하는 마라톤 병이라 했다. 통상적인 암 완치 기간인 5년 후에도 장기비행은 힘들 수 있었다. 발병 전에 인생 여행지를 다녀온 게 참 잘한 일이라며 스스로 토닥이며 여행 사진들로 아쉬움을 달랬다.     


조금은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던 그 시절, 외제차 안 산 것, 명품백 안 산 것은 전혀 아깝지 않았는데 사진과 영상으로만 본 궁금한 곳들이 많이 남아 아쉬웠다. 병실에서 퇴원 후 집에서, 홀로 누워 궁금한 곳 어딘가에 있을 미래의 나를 꿈꾸었다. 통증을 견디고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도피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꼭 나아서 오랫동안 느릿느릿 여행하기로.

남편과 함께 나이 들며, 되새김질하듯 하나씩 까먹을 추억 보따리를 마음에 쌓고 살아야지     

그러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신이 부르실 때가 오면

다행이다.

늙기 전에 여기저기 다녀올 수 있어서.

이곳, 저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도움 받고, 도움줄 수 있어서.

짝꿍과 이런저런 추억들을 만들 수 있어서.

생은 참 좋았던 여행이었다     

감사기도로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재미나게 살아야겠다.



돌아와서는 뭐 하려고요? 안 불안해요? 남편의 이야기     


아버지와 함께 일한 지 8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일을 가르친 후 사업을 물려주실 거라 생각했다. 3년간 아버지 시키는 일은 다했다.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아직 멀었나 보다, 좀 더 해보자.     


5년이 지났다. 여전히 말씀이 없으시다. 아버지 요구 사항은 하나둘 늘어 몸을 좀 더 혹사해야 했다. 장거리를 뛰어야 할 곳이 증가한 만큼 기름값은 더 드는데, 임금인상률은 5년째 0%다. 세계적 팬데믹 상황 속, 수익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월급 올려달라는 말은 차마 안 나온다.

      

7년이 지났다. 아내가 건강 문제로 퇴사하여 외벌이가 되었고, 생활비는 매달 (-)다. 큰일이다. 투잡, 쓰리잡 뛰어서 메꾸어야겠다. 몸을 쓰는 일을 몇 년간 하고 어느새 마흔을 넘기며 내 몸도 예전 같지 않다. 아버지 일을 물려받아 키워보자는 생각이 사라진 지는 오래다. 나도 문제지만 아버지도 연세가 있으신데 좀 쉬시지 않고, 건강이 염려된다.     


8년 차, 아내가 내게 대차게 말했다,

“여보, 너 나와라. 그만해!”     


아내의 제안에 대한 이유는 이랬다.      

첫째는 건강인데, 당신 몸 상태가 아버님 일을 더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둘째, 그곳엔 비전이 없다. 설사 훗날 일을 물려받는다 쳐도, 시장 전체가 사양산업인 그곳에 미래가 없다.

셋째, 의무감 외에는 보람도 관심도 없는 분야에서 일하며 젊음을 다 바치기에 생이 아깝지 아니한가!


끄덕끄덕. 반박불가. 하나같이 맞는 말이다.

 


잠깐!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는데 현실을 직시해 보자.     


[40대 초반, 전기전자공학 학사, 소지 자격증 : 운전면허증 ^^V. 끝.]

딱히 이력서에 쓸만한 경력이나 자격증 하나 없다.

     

망설이는 내게 아내가 질문한다. “천천히 생각해 보자. 당신 뭘 좋아하고, 뭘 잘하지?”  


그렇게 어려운 걸 왜 묻는 거야~?대답불가. 

이번 질문에는 더 대답을 못하겠다.    


아내는 덧붙였다.

급하게 일을 구하면 또다시 건강 갈아 넣는 전제로 일하는 고만고만한 일터로 옮길 뿐이다. 지금과 달라질 게 없다. 오히려 시간당 수당을 따지면 지금보다 떨어질 확률이 크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유럽 청년들은 대학 가기 전 이런 고민을 하며 gap year를 가진다던데, 지금이라도 gap year(s)를 가지며 이것저것 경험해 보며 천천히 찾아보는 건 어떨까. 40대, 이제 인생의 반 정도 살았다. 축구 경기도 45분을 뛰고 나면 Half time을 가지는데 인생 후반전을 잘 살기 위해 하프타임 2년 정도 넣는 건 사치가 아니고 필수라는 논리였다.


아내의 말에 묘하게 빠져든다.     


2년간 여행을 다녀온다고 금방망이가 뚝딱 나올 리 만무하다. 그러나 집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쌓이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기를, 더 나아가 인생 후반을 즐기며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아내와 재미있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집돌이에 환경의 변화를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안 해 본 것, 원래의 나였으면 안 했을 결정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보자. 2년 뒤, 조금 더 스스로에게 당당한 내가 되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 무모해 보이는 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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