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계절을 망각한 나른한 햇살이 눈까풀을 내리눌렀지만 밀려드는 노곤함은 추위를 거세게 부른다. 살을 가볍게 문질러주지만 속이 따뜻하지 않아서 그런지 여전히 참을 수 없는 2004년 12월 어느 겨울날이다. 춥다고 반복하는 입가는 무엇으로 지겨운 응얼거림을 놓아줄까. 하루에 지친 친구가 틈을 내서 들려준 목소리는 희미한 등잔불이 되어 지난 시절을 비춘다. 변치 않는 생활에 대한 가라앉은 읊음을 하는 와중에 우린 자주 그때를 묻는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꿈은 연극배우였다. 가느다란 손목을 휘두르던 몸짓엔 경극배우의 소질이 강하게 묻어 있었다. 아리따운 우희가 되어 초패왕을 사로잡는 비극적인 대륙 서사시를 손짓하리라! 이젠 TV 박스를 보며 중얼거리는 한숨이 되었다. 친구의 말을 들으며 극단적인 반동의 기질로 학교 공부와 공식적인 회합을 거부한 채 지하 강당에 숨어서 땀난 목청을 내던, 일필휘지를 내두르는 극작가가 되겠다며 굳게 다짐을 토하던 화가, 작가, 여행가, 거지. 꿈이 수십 번도 더 바뀌던 변덕스러운 속삭임을 떠올렸다. 뒹굴뒹굴 누워있다가 공상을 해 본다. 번잡한 현실을 떨치고 널린 재를 쓸어 담는 억세고 당찬 그녀를 꺼낸다면 어떨까? 잠시 변장한 ‘그녀’가 되어볼까 궁리한다. 껍질이 삭아야 속이 드러날 것이다.
깜박이는 불빛 사이로 한기만이 기분을 드러내는 방송 연기자실. 또 실직! 연출자와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다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홀로 분을 삭이지만 역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인기를 뻥튀길 마법의 팝콘기계를 전혀 쓸 수 없어 빈털터리 지갑만 만지작거린다. 든든한 백도 없고 믿을 건더기도 없는데 무슨 배짱인지 쥐꼬리만 한 출연료를 받고 사는 가슴에 산(山) 모양으로 불거진 자신감. 연기에 대한 나만의 열정과 최고의 한 컷을 위해 노력하는 스스로를 믿기에 시답지 않게 작품을 해석하며 대중의 눈칫밥을 먹는 기생자들보단 백배 낫다고 자부해 본다.
필사적인 바둥거림을 꼴 사납게 바라보는 뿔난 시선들은 자주 몸뚱이를 무대 밖으로 내친다. 그래, 오늘은 색다르게 바꿔 볼까. 그 누구도 초라한 광대를 알아보지 못하게 신종 마법을 써 주지. 성별도 바꾸고 부글거리는 샴푸가발을 쓰고 엄청난 화장발로 촌뜨기 여자가 되어 본다. 언제나 칠칠치 못하게 잘 차려진 세트장 위로 분망하던 괴팍한 행동과 마음을 그대들의 기대치보다 더 과장되게 부풀려 나긋나긋한 마네킹 위에 뒤집어 씌우는 거야. 분첩으로 누렇게 뜬 살을 분홍빛으로 토닥거리며 한바탕 난리를 친다.
저마다 입에 볼펜 대를 문 채 사람의 머리 위로 점수를 매기는 오디션 장(場). 간드러지고 우렁찬 목소리로 동굴에서 조용하게 잠들어 있던 그녀를 깨운다. 촌스러운 잿빛 드레스를 걸친 중년 여자의 모습으로! 전혀 보지 못했던 색다른 캐릭터의 출현에 눈이 휘둥그레진 사람들. 별스러운 호들갑 위에 드리워진 강인한 면모에 반한 걸까. 즉석에서 픽업되는 핀업 걸이 된다. 몸의 껍질이 남자를 포기하자 변장한 여자는 빳빳하게 물오른 푸근함으로 세상을 안아버린다. 나를 배척하던 여자들도, 그리고 성깔 시리게 쳐다보던 남자들도 꺼풀 속에 갇힌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석의 극을 무시한 채 달려든다. 당황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그걸 아나? 나의 시선은 언제나 젊은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다.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 중에서 유난히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울리는 떨림을 감지할 수 있다. 세상을 향한 두려움에 행복을 접어버린 한 여자, 자신의 것을 가질 수 없다고 고개 돌렸다. 근친의 종양은 불거진 사랑을 친구로 만들겠지만 눈에 타오르는 애정을 감출 수 있겠는가. 아! 그래,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선 모두가 바라던 껍질을 벗어야겠지. 웅크린 나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했던 거대한 분장도 그녀 앞에선 내던지고 말 거야. 역시 두렵지만. 터널의 끝에서 벗겨진 욕망은 벙어리가 되었던 입을 연다. 난 달라졌지만 사실은 그대로라고! 그리고 언제나 거짓 없이 그대만을 바라볼 테야!
더스틴 호프만의 맛깔스러운 분장과 재치 어린 연기만이 아니라 제시카 랭, 빌 머레이, 지나 데이비스의 젊은 모습들도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분주하게 스쳐가는 <투씨 Tootsie>. 새로운 미래에 대한 약속을 부드럽게 끌어올리는 스티븐 비숍(Stephen Bishop)의 [It might be you]는 힘차게 앞으로의 걸음을 재촉하지만 속 안의 그녀를 뒤돌아보는 이중의 도르래를 굴린다.
가끔은 외면만이 아니라 내 안에 숨겨진 본성까지 바꿔보는 것도 필요하다. 표면에 매달린 남녀라는 두 개의 성(性)만을 분주하게 가꾸며 살아가는 지구인보다 내면에 웅크린 외계인은 풍부한 세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자, 싹을 틔워보자! 남자나 여자가 아닌 독특하고 개별화된 모습으로. 몸뚱이를 처단하려 달려드는 외부와 피를 불러야 하는 싸움을 해야 할지도, 바깥으로 뛰쳐나오려는 움직임이 꿈틀대는 분열을 부를지도 모르지만 누구는 창을 들고 타인의 복부를 칠 것이고 누구는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 할복을 감행할 것이다. 굽은 칼을 부메랑보다 힘차게 던져 날 부르던 메아리를 낚아보는 것, 이 또한 재미있는 사랑놀이가 되지 않을까.
2004. 12. 17. FRIDAY
이전에는 영화를 삼시세끼 밥 먹듯이 봤다. 요즘은 영화를 보려고 하면 마음을 먹거나 별도로 시간을 내서 봐야 한다. 가볍게 대상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여유가 없다는 소리다. 오래전에 시청각적인 조절장치의 길들임을 벗어난 이유로 혼자서 이런저런 공상에 빠져있다 보면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게 된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무표정한 얼굴 위로 연극배우가 된 듯이 환하게 웃어봤다가 심각한 얼굴을 지어봤다가 두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판단의 순간이 다가오면 분주하게 날뛰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고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삶의 주변을 어디까지 정리할 수 있는가,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할 때 관건이다. 미래의 판을 짠다면 아예 제로섬에서 시작할 것인지, 그래도 기반은 남겨놓을 것인지 현실적인 물음이 떠오른다. 한방에 찰칵거릴 수 없는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생각보다 만들기도 결심하기도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