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던 대부분 중장년들에게 웬만해서는 부정할 수 없는 속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별을 단 장군들에 대한 경외감이다. 대부분 예비역들에게 군 시절에 만났던 지휘관과 사병이라는 인연의 끈으로 맺어졌던 장군들은 존경스러운 존재였고, 유사시에 자신의 운명을 전적으로 맡겨도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좀처럼 대면하기 어려운 존재였지만 마치 늘 집안에는 없으나 가정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아버지 같은 든든한 가장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전사령관을 역임한 민병돈 장군은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는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나 휘문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총상을 입었고, 시대의 혼란과 국가의 발전과정을 직접 체험하며 성장했다. 그런 개인적 경험의 바탕 위에서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15기로 졸업하고 군인으로서 강한 신념과 투철한 국가관으로 스스로를 무장했다.
민병돈은 군인의 역할을 단지 국가를 방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그가 깊은 국가관과 애국심을 가진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역사와 전략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자신의 군사 철학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훗날 그가 군사 작전을 계획하고 판단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그는 35년간 전후방 부대의 주요 지휘관으로 근무하면서 자신이 이끄는 부대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앞장서서 부대를 이끌며 부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예상치 못한 적의 움직임으로 인해 작전 계획을 급히 수정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신속한 판단과 결단으로 부대를 안전하게 이끌었다. 그는 구호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는 지도자였다. 그의 군 시절 이야기들은 그의 철학과 신념이 실제 행동으로 실현된 사례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훌륭한 지휘관으로 귀감이 되고 있다.
그런 평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장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이 땅에서 장군 호칭에 적합한 인물은 충무공 이순신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뿐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자신에 대한 장군 호칭은 존경받아 마땅한 훌륭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민병돈 장군은 단순한 군사 지도자를 넘어 정치적 변화의 시기에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 국가 안보와 군내의 질서를 유지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는 데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5공과 6공화국 시절 그가 최고 권력자들을 상대로 보여준 우국충정의 참 군인으로서의 자신감과 당당함이 그에 대한 평가가 올바른 것임을 증명한다.
그의 리더십과 원칙은 군 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정치평론가들과 역사학자들은 그를 한국의 정치적 안정과 발전에 큰 기여를 했던 인물로 평가하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다. 그는 군은 물론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지도자로서 한국 현대사에서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다.
이번에 그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는 국가의 비상시국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저런 장군들도 있었구나.”라며 탄식을 했다. 그나마 그들이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나약하고 비겁한 존재였다는 것을 평시에 깨닫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점에 모두들 공감한다.
만일 전시였다면 ‘저런 장성들을 믿고 어떻게 적들과 싸울 수 있었겠느냐’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이견이 없을 지경이다.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다.
그들 중 일부는 기개랄 것도 찾아보기 어려운 비겁함을 넘어 사병보다 못한 수준의 장성들이었다. 그들의 어깨에 달려 있는 별 계급도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정말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건 저런 인물들이 어떻게 별을 달고 국가의 가장 핵심인 부대의 지휘관들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떳떳하게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 모든 예비역들과 대부분 국민들이 같은 생각일 것이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모윤숙 시인의 유명한 시가 있다. 6·25로 나라가 ‘바람 앞의 촛불’의 운명에 처해 있을 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쟁터 곳곳에서 산화한 군복을 입은 젊은 청년들의 죽음과 남아있는 사람들의 애잔한 아픔을 담담하게 풀어놓은 글이다. 이와는 달리 지금 비겁하게 변명을 널어놓은 자들은 모두 눈을 뜨고 살아 있다. 그들이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변명에 집착하지 말고 살아서 법적·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길 바란다.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가수 김민기가 강원도 원통의 12사단 51연대 1대대 중화기 중대에서 복무하던 중 30년을 복무하고 전역을 앞둔 선임하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에 막걸리 2말을 받고 노래를 짓는 일이 있었다. 바로 1976년 겨울에 탄생한 ‘늙은 군인의 노래’이다.
노래는 젊은 청춘을 푸른 군복에 바친 하사관의 회한과 나라사랑의 마음이 담긴 노래로 유명해졌다. 군 복무하던 시절에 훈련 중 순직한 20대 초반의 동료들을 떠나보내며 이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쏟던 기억이 지금도 가슴 시리고 애잔하다. 4절로 이루어진 가사 중 1절과 2절, 그리고 후렴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1절)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2절)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자식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
(후렴)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6·25 전쟁 기간 20대 청춘의 나이에 낯선 전쟁터에서 죽음이 가까이 와 있음을 희미하게 깨닫고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그리워하면서도 조국을 위해 기꺼이 산화한 젊은 군인들.
퇴임 후에는 일체의 공직 제의를 뿌리치고 검소하게 살면서 중풍에 걸린 아내를 20년 동안 간호하며 2019년 상처한 후에는 스스로 세끼 식사를 챙겨 먹으며 국립묘지 안장 대신에 40년 전 마련한 허름한 집 마당에 아내와 같이 묻히고 싶다는 뜻을 가진 민병돈 장군.
용맹을 앞세우던 대한민국 최강 특수전부대의 지휘관인 장성으로 살면서 역사 앞에 드러날 진실을 감추고 처자식의 장래를 걱정하며 울먹이던 곽종근 장군.
이들에게 꼭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그들에게 국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