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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Apr 04. 2023

노병은 죽지 않는다. 오직 사라질 뿐

노병은 죽지 않는다오직 사라질 뿐.”

 

우리에게 익숙한 이 구절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점령 연합군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19일 미국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군직을 떠나는 고별사에서 이 말을 해서 유명해졌다. 


이 말의 기원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인들 사이에 불리던 군가에 나오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오직 사라질 뿐이라는 가사의 한 구절로 맥아더가 고별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영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을 위로하는 우리의 현충일에 해당되는 11월 11일을 양귀비꽃의 영어식 표현인 poppy를 차용하여 포피 데이(Poppy Day)’라고 부르며 추모한다. 다른 말로는 리멤브런스 데이(Remembrance day)’라고도 부르는데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이 선언된 날이 그 기원이 되었다. 



오래전 영국 시내에서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본 적이 있었다. 행렬의 맨 앞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노병을 선두로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투에 참여했던 영국 군인들이 당시 입었던 군복에 정부가 그들의 헌신에 감사하며 수여한 훈장을 가슴 왼쪽에 걸고 행군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노병들은 자신의 아들이나 손주, 손녀 혹은 그 또래의 젊은이들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넬슨제독의 높은 동상이 위치한 런던의 중심가 트라팔가 광장에서 수상 관저가 있는 다우닝가를 지나 국회의사당 방향으로 거리행진을 했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국가를 이끄는 상징적인 건물들이 위치한 장소를 행진하는 의미가 남달랐으리라. 



휠체어에 탄 가장 오래전 전투에서 생존한 노병을 맨 앞에 두고, 지팡이에 의존해서 행진을 하는 노병,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행진하는 노병, 그리고 비교적 현대사에 기록된 포클랜드전, 걸프전 등 전쟁에 참전했다가 생존한 군인들이 뒤를 따랐다. 


워낙 나이가 든 분들이니만큼 행진은 느리고 행렬은 길어졌지만 연도에 선 수많은 영국인들이 그들 노병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노고에 국기인 유니언 잭(Union Jack)’을 흔들며 열렬히 환호하고 감격해하면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던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벌써 삼십 수년 전의 기억이니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 행렬의 맨 앞에는 2차 대전에 참가한 아주 소수의 노병들이 행렬을 이끌고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후세대들이 선대의 국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을 기리는 전통은 이렇게 유지되고 있다.



우리에게 이런 전통은 언감생심 턱도 없는 일이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TV드라마는 물론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혹은 길거리나 공원에서 노인을 폄하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난무하는 뉴스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닌 게 되었다. 


많지도 않은 인구 속에서 성별, 지역, 출신, 종교, 빈부, 인종, 심지어 연령과 세대 간 편 가르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종이 된 한국인들은 이제 노인이 된 그들이 남은 여생을 국가를 위해 보여주는 애국심조차 ‘태극기부대’라고 비하하며 저주의 일성을 내뱉는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평생을 군에서 헌신하고 별까지 단 장성을 ‘*별’이라고 희화화하곤 한다. 권위주의 군사정부의 일부 독단과 폐해가 원인이 된 배경을 사람들이 잘 아는 까닭에 월남전에서 목숨 걸고 싸운 노병조차 그 비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평생을 공직을 수행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게도 ‘공노비’ 라거나 ‘*훈장’을 받았다는 비난의 소리가 있다. 왜 한국사회에서는 유독 이런 일이 두드러지는 것일까.

 


어느 정부 부처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부서 책임자가 자기의 동기를 대통령 표창 후보자로 상신했다. 부부서장도 모두 입사동기였으니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대상자였다. 그는 부서에 전입 온 지 기껏 4개월쯤 된 인물로 실적이 전무한 위인이었다. 


당시 부서에는 10년 20년을 업무에 매진하며 헌신한 직원들이 수두룩했지만 추천한 위인이나 대통령 표창을 받은 인물 모두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한 것이다. 


결국 그들 모두는 직원들의 비난 대상이 되었고 표창을 받은 인물은 재직기간 표창 사실조차 감추고 쉬쉬하다 조직을 떠났다. 지금쯤 그는 집 거실 어딘가에 표창장을 걸어두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가족과 함께 자랑스러워하고 있을까. 이런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전통이 우리나라 공직사회에서 보편적인 현상이 된 것인지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대통령과 그를 보좌한 인물들, 오늘의 북한이 그토록 염원하던 ‘강성대국’을 이룩하는데 물질적으로나 정책적으로 호위무사 역할을 한 대통령과 당시 정권의 실세들, 심지어는 퇴직 전에 스스로 셀프훈장을 받은 대통령이나 그 측근들이 모두 쉬쉬하면서 훈장과 표창을 받는 게 전통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무엇이 두려워 훈장과 표창을 받은 사실을 쉬쉬할까. 자신도 떳떳하지 못한 사실이 양심에 찔리기는 하는 모양이다. 이런 지경이니 젊은 세대로부터 *별이니 *훈장이니 하는 조롱이 생긴 게 아닐까. 


6·25 전쟁 기간 전선에서 목숨 걸고 피를 흘려가며 적군과 싸운 공로로 받은 사병의 훈장을 가로챈 후방의 행정직원이나 상사들이 다반사였다. 그런 지경이니 설혹 우리도 영국의 Poppy Day와 같이 6·25 전쟁이나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중심이 되어 광화문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이 연출되면 멱살잡이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위인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오래전 얘기가 아니어도 우리 현대사에서 오로지 국가를 위해 헌신해서 나라가 주는 훈장을 받은 이들의 명단이 공개되었을 때 떳떳하다고 자신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어렸을 적에 조부님이 들려준 얘기가 있어 소개한다. 

예전 일제 강점기에는 나라의 사정이 어렵고 어수선해서 제 나이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 겨우 입학한 장성한 나이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느 해인가 학급에 또래에 비해 나이가 훨씬 많고 힘도 세서 조선학생을 괴롭히는 일본 학생들이 있으면 그들을 찾아가 복수를 해주는 큰 형님뻘 나이의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가 학습능력은 부족해 시험을 치면 늘 과락을 받아 졸업마저 불안할 지경에 놓여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창 동생뻘인 같은 학급의 조선 학생들이 꾀를 내어 시험시간에 그에게 커닝을 해서 나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나름 배려(?)를 제안했는데 그는 단번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낙제가 되면 그만이지 학과점수 나쁜 자신이 사람점수까지 나빠서야 어디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냐는 게 그의 신조였다. 윗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탐하는 잘못으로 나라를 빼앗긴 것인데 백성들마저 그렇게 행동하면 일본인들이 조선을 어떻게 보겠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결국 그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졸업을 못하고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그는 동네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생계를 유지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생각만큼은 당시 세도가 못지않은 기개가 있는 인물이었다. 오늘날 훈장이나 표창을 받은 사실조차 쉬쉬하며 집안에 걸어둔 그것을 가족에게나 보여주는 위인들이 새겨들을만한 얘기가 아닐까.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화두가 ‘공정’이다. 이들은 사회의 선대들이 이룩한 수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드러난 부정적인 사례들로 인해 나머지 공적마저 폄하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세대 간 갈등의 원인이 되는데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악폐나 악습은 전통이 되는 것인지 그런 부류의 인간들일수록 사회의 기득권층을 형성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에 탁월하다.


평시는 물론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군인은 전쟁터에서, 학자는 연구로, 교사는 교육으로, 기업가는 사업으로, 기술자는 현장에서, 농민은 농사로 성실하게 헌신함으로써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최선을 다한다. 이것이 동물과 다른 우리 인간의 도리가 아닐까.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이런 순리에 얼마나 충실했을까.



얼마 전 귀한 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젊은 시절, 국가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부름을 받아 국가를 위해 평생을 헌신할 기회를 가진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목격했다. 


북한전문가로서 국익을 지키는 선봉의 자리에서 일생을 헌신한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출판기념회였다. 그 자리에서 인생 선배들의 국가를 위한 헌신을 이해하게 되었다. 


평양출신인 그는 6·25 전쟁 기간 혈혈단신 남하해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꾸준한 노력 끝에 타고난 기억력에 통찰력과 판단력을 스스로 훈련하며 북한지역 전문가로 성장했다. 


자신이 태어나 형제들과 함께 교육받고 성장한 추억이 서려있는 지역에 대한 연구이니 관심과 애정도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었을 것이다. 


오랜 노력의 결과로 그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에 적절한 곳에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은 인물,” 앞서서 시대를 읽을 줄 아는 인물,” 남북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정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전략가라는 평가와 찬사를 같은 시대를 호흡하던 동료와 후배, 전문가들로부터 아낌없이 받았다. 


그의 노력이 어디 하루아침에 이루어졌으랴. 그는 지금도 도서관에서 연구 활동을 지속한다고 한다.



비록 다른 공간과 시절을 살아왔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 선대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가치는 그들의 가슴속에 자부심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세계 최빈국이던 조국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삶과 가족의 희생을 무릅쓰고 헐벗고 처량한 처지의 국민들을 위해 헌신한 그들의 노고가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미국의 작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가 1949년 12월 10일 스톡홀름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고 한 답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인류에 공통된 보편적인 진리 즉 사랑명예자비자존동정희생 이외에 무엇이 더 중요하랴”(Forget everything except the old universal truths – love, honour, pity, pride, compassion, and sacrifice).



한겨울에도 냉수 한 사발 들이켠 후 홀겹 점퍼 입고 가족들 배웅을 받으며 어깨를 으쓱 올리고 출근해서는 세계 최빈국이던 불쌍한 국민을 위한 희생 속에 조국에 대한 사랑의 일념으로 적과 대치하면서 평생을 국가에 헌신하다가 조직의 문을 떠난 이 땅의 노병들. 


이들의 노고와 헌신을 훼손시키는 행위가 비록 일부의 경우겠지만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로 인해 노병들의 헌신과 애국심마저 폄하돼서야 되겠는가.


포크너가 언급한 인류에 공통된 보편적인 진리 중에서 하나도 허투루 여긴 게 없이 명예와 자부심으로 무장하고 자신의 삶을 희생해 가며 오직 국가발전을 위해 살아온 선대 세대의 자존감을 젊은 세대가 인정해 주는 한 아무리 불손한 세력들이 대한민국의 과거를 폄하하고 현재를 흔들어대도 노병은 죽지 않는다오직 사라져 갈 뿐이라는 군가의 한 구절은 그들 모두에게 합당한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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