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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바름 Dec 16. 2023

퇴사하는 직원의 마지막 모습

마지막까지 아름다울 순 없을까?

평소와 다름없는 오전 근무시간. 팀원 L이 갑자기 할 말이 있다며 사무실 밖으로 나를 불러낸다.

- 왜? 무슨 일 있어?

- 팀장님. 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서 원서 내고 면접을 봤는데 며칠 전에 최종합격 통보를 받았어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L은 우리 팀에서 책임감 있게 일하는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직원이다. L이 이렇게 갑자기 퇴사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당황했지만 본인 발전을 위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길을 가야 하는 L을 격려했다. 본인이 원하는 곳에 입사하게 되어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우리 팀 업무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남은 기간 인수인계와 업무 정리를 잘해달라고 부탁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머리가 아파왔다. L이 퇴사하면 인력이 충원되기까지 몇 개월은 팀 내 다른 직원이 업무를 대신해야 한다. 바쁜 시기에 직원 한 명 빠지면 업무 추진에 타격이 크다. 또한 L이 추진하고 있는 현안업무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L이 진행 중인 현안 업무라도 마무리해 주길 바랐다. 2년간 일하면서 내가 아는 L은 책임 있는 모습으로 궂은일을 솔선수범했고 팀장인 나를 가장 많이 배려하는 직원이었다. 그랬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마무리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L은 사직 일자를 3주 후로 정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2주 동안 본인 잔여 휴가를 사용하겠다고 했다. 이동하는 회사 입사일이 언제냐고 물어보았다. L은 아직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다며 답변을 피했다. 나는 L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가장 바쁜 시기임을 감안해서 1주일만 더 근무하면 안 되겠냐고. 현재 우리 팀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L이였다. 그러나 L의 답변을 듣기까지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는데요."

너무 단호하게 돌변한 태도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회사 규정을 명백히 따지면 최소 한 달 전에는 퇴사 의사를 밝히고 사직서를 제출해야 한다. L은 3주 후에 퇴사하겠다고 했으니 규정을 정확히 따지자면 내 부탁은 부당한 요구가 아니다. 그러나 퇴사하겠다는 사람에게 규정을 따지며 남은 시간 얼굴 붉히고 지내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L은 새로운 곳에 출근하기까지 한 달 반정도 시간이 있었다.


남은 근무기간 동안 L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L은 달랐다. 본인이 진행하고 있는 업무 진행상황을 물어보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세요?라는 표정으로 추후 진행상황은 본인 업무를 대신하게 될 직원에게 전달해 놓았다고 답했다. 사직서를 낸 L은 더 이상 내가 알던 L이 아니었다. 우리 회사는 올해부터 본인과 가족 1인의 건강검진비를 지원해 주는 복지제도가 생겼는데, L은 사직서를 내고 본인과 동반가족 건강검진을 했다. 그리고 회사에 비용을 청구했다.

마지막 출근일, 본인 업무를 대신하게 될 동료가 '잘 지내고 다른 곳에서도 발전하고 건강하라'라고 인사했다. L은 동료의 이별 인사에 한마디 대꾸도 안 했다. 그동안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속을 알 수 없었다. L은 이곳에 다시는 발걸음도 하지 않을 것처럼 행동했다. 나도 그녀처럼 똑같이 모질게 대할까 싶다가도 옛정을 생각해 그러지 않았다.

"L 씨. 좋은 소식 있으면 꼭 연락하고, 놀러 와. 맛있는 거 사줄게"

내 마지막 인사는 공허하게 허공을 떠돌았고 L은 대답 없이 쓴웃음만 지으며 회사를 떠났다.


나보다 10살 어린 L은 37세 미혼 여성이다. 대학 졸업 후 전공과 전혀 다른 분야를 공부하고 사회 경험을 했기에 당연히 이직도 여러 번 했다. 다른 회사에서 나올 때도 이렇게 행동했을까. 나와 같이 일하는 2년간 서로 잘 지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 L의 행동이 더 속상했다. 본인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인해 힘들어할 남은 동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고, 이직을 준비하면서 팀장인 내게 한마디 의논도 안 한 사실이 서운했다. 사실 내게 의논했다 한들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다. 떠날 사람은 언젠가는 떠나게 되어있다. 나는 평소 남 인생에 깊이 관여하며 조언하거나 충고하지 않는다. 본인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러한 성격을 알기에 L이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2년 전 나는 처음 팀장을 맡았고, L은 경력직으로 입사해 우리 회사에서 나와 함께 처음 일했다. 나는 처음 맡은 팀장역할을 잘하기 위해 애썼고 개성 강한 7명의 팀원을 문제없이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데리고 있는 직원 방어막이 되어 상사나 다른 팀으로부터 직원을 보호하는 과정에 마음고생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나를 보조하며 내 마음을 이해해 주고 내게 고마움을 표하던 L이었다. L은 팀원 누구보다 솔선수범했고 급한 자료가 필요할 때면 가장 빨리 자료를 정리했다. 나 또한 L이 고마웠다. 나는 고생하는 그녀를 항상 격려했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게 지냈는데 갑작스러운 퇴사와 마지막 내게 보여준 그녀의 행동에 나는 많이 실망했다.


이제 L을 다시 만나게 될 일은 없다. 회사에서 팀장과 팀원이라는 역할로 만난 사이, 2년간 하루 8시간 이상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퇴사 후 그녀와 나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같이 일했던 과거 동료일 뿐이다. 일로 만난 사이는 마지막 모습이 중요하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좋은 기억이 있지만 마지막이 아름답지 않았다. 지금 그 사람을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시간이 좀 더 지나 그때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물어볼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만, 지금 솔직한 심정은 다시 만날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나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사람들과 그동안 어떻게 이별해 왔는지 내 행동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만나는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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