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예술하는 아픈 몸
나는 내 자신을 예술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유로는 우선, 등단하지 못했다. 독립출판으로 <오른쪽 다리가 불편하세요?> 라는 책을 내었으나 분량이 너무 짧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20대의 치기어린 글로 부끄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그 짧은 에세이집을 엮어서 책으로 낼 것이다. 없앨 생각은 전혀 없다는 뜻이다. 비록 악성재고로 남아버렸다고 해도.
어린 시절 나는 언니로부터 진로를 빨리 정하라는 압박을 받아왔다. 한국사회의 특성상 진로를 빨리 정해야만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었기에 언니 입장에서는 걱정하는 것이었고, 나를 위한 것이었지만 벌써부터 십 년도 더 된 미래의 나를 생각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것은 글쓰는 일이었다. 잘한다고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언니는 세부적인 계획을 짜주었다. 작가로만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먹고 사는 게 힘드니, 우선 공무원이 되고 부차적으로 작가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지만 인생이란 참 신기하다. 말을 따라가는 것 같다. 결국 지금의 나는 공무원이 되었고, 작가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정확하게는 아픈 몸의 문학을 하고, 아픈 몸의 에세이를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
어릴 때는 의식적으로 질병과 장애라는 키워드에 접근하지 않았다. 내 글 안에 넣는 순간 내 글이 너무 현실적이 될 것 같았다. 나에게 현실은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달리기에서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모두가 이미 정해진 바퀴 수를 돌고 쉬고 있을 때 나 혼자서 멀리서 달려가는 것이었다. 뒤쳐지고 외롭게 뒤에서 남겨지는 일.
나는 굳이 그것들을 내 소설 안에서 보고 싶지 않았다. 소설은 내가 상상하고 그려낼 수 있는 세계. 하지만 기묘하게도 내 소설들은 모른 척 아픈 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이미 나는 아픈 몸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나의 첫 소설 <열린 창문>은, 나이가 들어 전립선이 약해진 노인이 소변이 샐까 기저귀를 차고, 한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의 창문을 닦는 소설이다. 매직미러로 된 창문은 노인의 얼굴만을 비출 뿐, 그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노인은 층마다 소리로 여기는 헬스장이구나, 여기는 회사로구나.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던 노인이 끝끝내 단 하나 열린 창문 안으로 스스로 들어간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바깥에 있던 존재가 안으로 들어가길 바랬다.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처럼 사회가 의도적으로 분리하고 숨긴 사람이 다시 세상에 편입되기를 원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단순히 노인의 이야기로 나와 분리해서 생각하며 썼지만, 사실 이 노인은 나였던 것 같다. 그걸,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깨닫는다.
작년, 나는 이치카와 사오 작가가 쓴 <헌치백>이라는 소설을 읽고 깊은 상을 받았다. 소설은 일본에서 권위있는 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소설로, 최중증장애인 여성이 "임신하고 낙태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자신의 요양보호사를 성매수하는 이야기다. 단면적으로만 말하자면 그러하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소설이 현실의 장애여성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을 흥미로 읽은 사람들이 저 사람도 사실 속에 욕망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고 장애여성을 침범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손이 덜덜 떨렸다. 화가 많이 났다. 이 소설에 상을 준 사람들도 미웠고, 이 소설을 재밌게 읽는 사람들도 미웠다.
물론 소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쓸 자유가 있지만, 그것이 실제 사람들의 삶에 해악이 된다면, 단지 포르노에 불과하다면? 그건 좋은 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 내 안에는 논리가 너무 강했고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상을 준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을 읽었지만 그 누구도 현실의 장애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신선함, 파격적. 의도는 알겠으나 왜 이러한 부분을 비판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소설이라 하더라도, 다른 여성들도 모두 그런 욕망을 갖고 있거나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소설이 전형적인 장애인의 경험부족으로 인한 강간판타지라 여겨졌다.
그래서 교수님 앞에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열을 좀 식히고 소설을 바라보고, 교수님과도 몇 차례 대화를 이어가며 소설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비로소 이 소설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다양한 장애여성의 시각을 보여주는 장애문학이 부족한 것이 문제임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 작가가 내게 묻는 것 같았다. 현실의 장애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나는 가장 진실한, 장애여성으로서의 내 목소리를 냈을 뿐이야. 너는 네 목소리를 내보긴 했어?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소설을 쓸 때 장애와 나를 분리했다. 소설은 장애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 나의 비장애인 코스프레가 가장 빛나는 것은 소설을 쓸 때였던 것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몸이 겪는 수치와 굴욕을 소설에 녹여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걸 쓰는 순간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기 위해 호소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나는 '멀쩡'하고 싶었다. 적어도 소설에서만큼은. 그래서 잘 포장된 문장 속에, 누구도 내 아픈 몸을 이유로 상처주지 않는 서사 속에 내 진짜 몸을 감추었다. 현실의 장애여성을 위협하는 사람, 용기 없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람. 그게 나였다.
이제 나는 안다. 나의 현실에 대해서 쓰지 않는 것은 내가 나를 외면하는 일이라는 것을. 내가 그토록 탈피하고 싶었던 비장애인 코스프레를 예술이란 이름 하에 자행한다는 것임을. 나는 언제든 내가 원하는 글을 쓸 수 있고, 그게 장애와 관련된 글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모른 채 거리를 두고 써왔던 것은 다르다. 지금부터의 내 글은 달라질 것이다. 나는 내 나름 반 평생을 글을 써왔다 생각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출발점에 섰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