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일하는 아픈 몸에 관하여
사람은 돈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생활하기 위해서는 먹을 식량이 필요하고, 잠을 잘 공간이 필요한데 이것들은 모두 금전을 통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 그 누구도 이 명제를 피해갈 수는 없다. 적어도 작금의 상황에서는 그렇게 느껴진다.
돈은 주로 일을 해야 주어진다. 현재 우리나라의 최저시급은 10,030원이다. 그리고 나는 최저시급에 못 미치는 월급을 받고 있다. 직업이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불만은 없다. 내가 선택한 직업이니까.
내가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아버지가 공무원이었고, 자식인 내게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바랐다. 2. 나의 질병과 장애를 어느 정도 배려해줄 수 있는 회사를 원했는데, 국가에서는 헌법으로도 보장하고 있으니 아픈 몸에 대해 '척'이라도 케어해줄 것이란 생각으로 이 직업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픈 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몇 가지 부류로 갈리는 것 같다. 하나는 "무조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는 아픈 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없는 사람이며 우리는 균등하게 일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전자는 내가 아픈 몸이라는 사실에 매몰되어 내가 자립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에 대해 지적하면 수용하고 태도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를 내며 자신의 배려를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는 "이게 왜 나빠?"라고 물을 수 있지만 내가 볼 땐 후자가 더 해악이다. 그들은 아픈 몸의 고유 특성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개인의 노력으로 개선할 수 있는 문제로 보고, 배려라는 이름으로 특혜를 줬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는 개인의 노력으로 개선할 수 있는 영역의 한계가 분명하고, 배려 없이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그 두 시선 사이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는다.
주체적으로 내 발걸음을 옮기고자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들의 시선에 끌려갈 때가 있다. 어쩔 때는 내가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들의 경계가 모호하고 알 수 없어서 동료에게 일을 떠맡기게 되거나, 잘하고 싶은 마음에 노력하지만 개선되지 않아 몸의 건강을 망치고, 결국 일까지 망쳐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처음 공무원에 입직했을 때가 딱 그랬다.
신입 공무원인 나는 일을 잘하고 싶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신입의 패기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인천에 살던 나는 그야말로 패기 그 자체여서, 서울에 있는 직장을 차를 타고 다니려 했다. 그러나 9시 출근을 하기 위해 8시쯤 차를 타고 출발하면 차가 심각하게 막혔고, 차에 오래 앉아있을수록 무릎이 아프고 다리가 저려왔다. 끝내는 감각도 사라졌다. 그렇게 해서 겨우 도착하면 직장은 지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찍 일어나 일찍 출근했다. 아예 7시에 나와 8시에 도착했다. 그 모습을 본 상사는 내게 유연근무제 사용을 권했다. 그래서 나는 유연근무제를 이용해 7시 출근, 4시 퇴근하였다. 정말이지 교통정체는 겪고 싶지 않다는 외침이었다.
매일 5시에 일어나 출근한다. 허약한 몸은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것만으로 하루를 마무리해버린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헛구역질이 나서 위내시경을 그 해해만 두 번 받았다. 약을 먹어도 내 스트레스성 위염은 가시질 않았다. 그러던 중 교통사고까지 났다. 비 오는 날 속도를 내려던 차량이 차선을 변경하고 달리던 중 내 차의 뒤를 친 것이다. 사고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몸이 이상했다.
오른쪽 어깨 날개뼈 안쪽이 아프기 시작했다. 손가락까지 저려왔다. 이상했다. 건강염려증이 심했던 나는 덜컥 겁이 나 조퇴하고 병원으로 바로 달려갔다. 아무 이상 없었다. 신경주사까지 맞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 아픔은 실재한데 어디서도 보증하지 않았다. 한의원에서도 의아하게 여길 정도였다. 나를 고객으로 받는 병원조차 이랬으니, 직장은 어떠했겠는가?
몸이 아파오고, 공무원의 턱없이 적은 월급에 현타를 받은 나를 달래기 위해 상사는 내게 재택근무를 주 2회 정도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조금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메일로 말하기를 "네가 항상 자리를 비워서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고 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재택일 때 나는 정말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다. 하루 여덟시간, 일찍 출근해서 일찍 퇴근했을 뿐 맡은 일은 다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위해 배려하느라 희생하고 있었다. 억울하면서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그 메일을 받고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아팠다. 내가 맡은 바 노력하기 위해 주말 내내 출근했던 일이라든지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보였다. 보이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유난스러운 사람이 눈에 띄지, 조용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한편으로, 4년 전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 감정은 내가 처음 겪는 감정이 아니었다.
4년 전 나는 나라에서 시행하는 장애인 일자리 창출 사업 중 하나인 장애인 행정 도우미로 주민센터에서 1년 계약직 일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였다. 나는 당연히 내가 원래 일하던 동 주민센터로 배정될 줄 알았는데,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다른 동 주민센터가 배정되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원래 신입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잘해야지 하는 마음 뿐.
그곳에서 A 상사를 만났다. 말투가 고압적이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지만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와 나는 자꾸만 어긋났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내가 민원인을 응대하다가 부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내 팔이 그가 쌓아놓은 서류뭉치를 치는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A 상사는 주민센터의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아! 좀!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무안하고 부끄러웠다. 민원인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내가 서류를 친 것은, 실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자리에서 한 번에 다리 힘만으로 일어나는 걸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 차례 비장애인, 비질병인에게는 불필요한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건 바로 어딘가를 짚는 것이다. 사무실 자리는 매우 좁았고, 내가 손을 짚을 수 있는 곳은 적었다. 이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던 일인 것이다.
나는 그래서 A 상사에게 일이 끝나가는 5시쯤, 조심스럽게 상담을 요청했다. 아까 내게 소리지른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A 상사는 상담요청에 자리를 옮기지도 않고 나를 보지도 않으며 민원대에서 말하라 했다. 그래서 나는 "아까..." 하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러자 A 상사가 "아, 그거요? 괜찮아요, 괜찮아." 호탕하게 말했다. 하지만 난 사과하려던 게 아니었다. 지금 정정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계속 오해할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아니요, 사과하려던 게 아니에요. 아까 그렇게 소리 지르신 거 정말 무안했어요." 그러자 A 상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내 말투에요." 나는 즉각 답변했다. "그래도 제게는 그런 식으로 하지마세요." 분위기는 싸늘했다.
그날 이로 A 상사는 내 인사를 무시하거나 나를 건너뛰었다. 나는 그래도 괜찮았다. 어쨌든 일하고 버텨서 퇴직금 받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내 스스로 웃으면서 민원인을 대하고 일을 처리한다 믿었지만 집에 가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이 나를 덮쳤고, 무엇도 먹고 싶지 않아 굶는 날들이 이어졌다. 정신과에 가서 약을 먹으며 버텼지만 잠은 오지 않고 안 그래도 마른 몸은 10kg나 더 빠져 앙상해졌다. 일할 때 손을 떠는 날도 많았다. 긍정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신체적 반응은 정직했다.
하지만 나는 일하고 싶었다. 생활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려던 나를 완전히 무너뜨린 일이 생기고 말았다. 바로 직접적으로 A 상사의 폭언을 들은 것이다. 그는 내게 "존나" 짜증난다고 했다.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고, 선택하라고 했다. 그만두든, 내 말을 듣든. 나는 그 둘 중 무엇도 따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A 상사의 업무적 지시를 안 따른 적은 없다. 다만 일을 정확히 하기 위해 물었을 뿐이다. 어디로 전화를 거는 거죠? (지시는 줬으나 메모를 붙였다고 하는 곳에 메모가 없었다.) 여기에 연락처가 없는데요. (찾아보면 보이잖아요. 안 보여요? A 상사는 말했다.) 그걸 A 상사는 말 안듣는다고 표현했다. 나는 전임 장애인 행정 도우미와 달리 A 상사의 폭언과 건들거림에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일에 있어서도 자꾸만 캐묻고 귀찮게 했다. 그리고 절뚝이는 몸으로 감히 A 상사의 소중한 서류뭉치를 떨궜다.
나는 이제 견딜 수 없었다. 간접적인 침묵과 무시라면 참을 만했지만 이젠 달랐다. 상대가 직접 나를 쳤다. 나는 주민센터 한구석의 어두운 창고 같은 상담실에 들어가 상담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내 피해사실을 입증할 서류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말을 하는데 눈물이 났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굴려고 하는데 너무 서러웠다. 선생님은 따뜻하게 나를 받아주셨다. 조퇴한 뒤엔 다녔던 병원을 돌면서 진단서를 받았고 집에 가서 진술서를 써서 동장님께 상담을 요청드렸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다. A 상사가 내 옆자리에서 건너자리가 되었다는 것 외에는. 추후 나는 장애인 일자리 담당자에게 이 문제를 말했고 내 힘없는 목소리를 포착한 그가 갑질 신고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직장내괴롭힘으로도 신고했으나 결과는 산뜻하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갑질 신고가 가장 낮은 단계의 징계인 훈계 조치를 내렸다는 결과가 나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건 지극히 나의 시점으로만 쓰인 나의 이야기다. A 상사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일 못하는 직원이었을지도 모른다. 힘을 쓸 수도 없으니 시킬 일도 적고, 그런 주제에 정규직보다 월급 더 받는 비정규직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는 A 상사를 도리어 위로할 것이다. 너 고생 많았어. 그런 장애인 많지. 일 못하고 사고만 일으키는 장애인들 말이야.
실제로 동 주민센터에서 일할 때 나를 좋게 봐줬던 주사님 중 한 분은 내게 지지 씨는 그런 장애인이 아니니 어서 시험을 봐서 공무원이 되라고 했다. 나는 그 속뜻을 알지만, 나와 그런 장애인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지을 수 없었다.
아프지 않은 몸들이 주류인 사회에서 아픈 몸은 개인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그러게 관리해서 최선의 상태를 유지했어야지. 손가락질 당한다. 하지만 아픈 몸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은 누구나 노화한다. 병이 든다. 이건 저주가 아니라 그냥 당연한 생로병사의 이치이다. 그러나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의 정상의 몸은 이를 철저히 외면하고 병든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나는 작년 6월 질병휴직을 감행했다. 갑작스런 우울증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내 몸에 대한 회의도 컸다. 정신이 아프면 몸이라도 멀쩡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약이 뭔가 안 맞는 것인지 몸이 자꾸 휘청거렸다. 내가 이에 대해 상사에게 어려움을 토로하자, "너보다 더 힘든 사람이 많다"며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나는 그 말에 그냥 웃었다. 내 속에는 그렇다면 지금 실존하는 내 힘듦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가? 하는 반항적인 마음이 들끓고 있었다.
나보다 아픈 사람, 힘든 사람. 많다. 예를 들어 통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던 남자를 보자. 그의 이름은 폴 알렉산더, 1946년 댈러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6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그때부터 철제 폐속에서 살았다. 그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학교에서는 장학금을 받았으며 변호사가 되어 법정에서 의뢰인을 대리하기도 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폴 알렉산더를 존경한다. 주어진 환경과 고난에서도 그는 당당하게 자신을 피워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렇게 대단할 수 없다. 그가 대단한 건 대단한 거다. 그렇다고 해서 그처럼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한 이들이 불평불만이 많아서, 스스로 노력하려고 하지 않아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의 자리가 있고, 저마다의 싸움이 있다. 그 모든 싸움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타인과 비교하여 위대하지 못함을 깎아내려지는 것은 정말이지 어불성설이다. 가난한 사람이 자수성가해서 부자가 되는 이야기는 실력주의의 환상임이 많이 알려졌는데, 이 에이블리즘(장애차별주의/비장애중심주의)의 신화는 왜 잔불처럼 꺼지지도 않고 자꾸만 화마가 되어 아픈 몸을 고통스럽게 하는가?
장애인 공무원 간담회에 참석했을 때, 다른 장애 공무원들과 어려움을 나누며 나온 이야기로 "부서의 그 누구도 제가 장애인인걸 모른다"는 것이 나왔다. 장애는 배려해야 하지만 동시에 민감정보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개인이 밝히지 않으면 밝혀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장애인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장애로 인한 차별 또는 무조건적인 배려를 받는 것을 피하고 동등한 자리에 서기 위함"이지만 "역으로 내 장애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운 일"임을 말했다. 결국 선행되어야 할 것은 아픈 몸들의 노력이 아닌 인식개선인 것이다.
나를 포함한 아픈 몸들이 원하는 것은 특별한 대우나 극복의 압박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 받으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이다. 장애를 숨기지 않아도 되고, 밝히는 순간 차별과 과도한 배려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그런 환경 말이다.
나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베리어프리가 일상이 된 사회. 그 사회를 꿈꾸며 나는 지금도 글을 쓰고 일을 한다. 내 자리에서 버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목소리에 반항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배려가 아닌 상식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