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자리는 함께 만드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졸업사진을 찍을 때 우리 반은 한 글자씩 쓰인 종이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다 합쳐서 읽어보면 "2호선 타고 대학 가자"가 완성된다. 때는 2012년, 수도권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꿈인 때였다. 그리고 나는 꿈을 이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버스를 타고 역으로 가서 1호선을 탔다. 그리고 신도림에서 내려 2호선으로 환승해서 합정역에 내렸고, 그곳에서 다시 학교 셔틀버스를 타거나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로 이동했다. 1시간 반에서 두 시간 걸리는 거리. 편도만으로 그랬으니 하루에 네 시간은 족히 바닥에 버리는 셈이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든 아끼기 위해서 책을 읽고, 낑겨서도 오디오북이라든지,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하려고 애를 쓰던 게 기억이 난다. 지금이나 그때나 '갓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사회기조였다. 게으르게 살 수 없었다.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지하철의 꽃, 1호선. 다른 호선들에 비해 낡기도 낡았거니와 기묘하고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오늘도 평범한 1호선이란 제목으로 인터넷에 올라오는 사진들만 봐도 범상치 않다.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나는 1호선을 최대한 평화롭게 타기 위해 웬만한 것들은 그냥 인내했다. 자리 좀 비키라는 듯 눈치 주며 째려보는 중년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내 앞에서 들으라는 듯 젊은 것들은 자리를 양보 안 한다고 욕하는 사람에게 사실 나도 장애인이라고 따로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때는 그럴만한 체력도 있었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굳이 부딪히지 않고 지나갈 수 있다면 그게 최고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나는 집에 가면 그날 했던 행동들을 반추하고 반성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실수를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너그럽게 봐주었겠지, 생각하며 내 마음을 달래려고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무례한 행동을 하고, 당연하다는 듯 젊은 사람은 질병과 장애에 해당하지 않으리라 믿고 몰아내는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한숨 쉬고 그냥 넘어갔을 내가,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건 "나도 힘든데"라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화가 아니었다. 힐링캠프를 다녀온 뒤 나는 나와 같은 환우들을 자주 떠올렸다. 또 나처럼 티 나지 않는 장애인, 질병인들이 생각났다. 그러자 내가 여기서 참으면 이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도 무례하게 행동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참지 않았다. 무례한 사람들에 맞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에피소드는 많다. 주로 노약자석과 얽힌 이야기들이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얼마를 서 있던 쌩쌩했던 나는,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오래 서 있으면 하지의 감각이 둔해지고 발의 감각은 아예 없어지는 걸 느꼈다. 움직일 수는 있지만 내 발이 아닌 것처럼,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한 그 미묘한 느낌은 몹시 불편했다. 다행히 자리에 앉아 쉬면 감각이 돌아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두려웠다. 이러다가 '안 돌아오면' 어쩌지? 그래서 나는 더는 무리하지 않고 노약자석에 앉는 것을 택했다.
그러자 묘하게 날카로운 시선들이 나를 재단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 번은 지하철에서 노약자석에 앉자 옆 자리 할아버지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눈을 흘겼다. 이에 불쾌해진 내가 "왜 그러세요?" 묻자 할아버지가 지하철 안의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이 부당한 상황을 알려야겠다는 듯 외쳤다. "장애인인지, 임산부인지 뭔가 해서!" 나는 표정 변화 없이 아주 차갑게 대답했다. "장애인입니다. 이제 아셨으니 쳐다보지 마세요." 싸움에 아주 지긋지긋해진 때였다. 아니, 모르겠으면 답답하면 물어보면 대화로 해결될 것을 저 괘씸한 것! 하고 쳐다보는 노인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그렇게 말하고 이어폰을 끼자 옆에서는 기가 차다는 듯 하! 참! 하고 씩씩거리는 소리를 냈다.
또 한 번은 자리에 앉은 내게 젊은 사람이 왜 자리에 앉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지하철 칸의 모든 사람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매서운 눈길이었다. 나는 주눅들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저는 장애인이에요. 그리고 노약자석은 장애인이 아니어도 젊은 아픈 사람, 다친 사람도 앉을 수 있어요. 노인만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에요!"
나처럼 본인의 호통에 깨갱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는 여자를 처음 만난 것인지, 그 할아버지는 자신도 장애인이라며 갑자기 자신의 복지카드를 내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 필요없어요. 안 궁금해요!" 사실 보통 여기까지 오면, 할아버지도 아 실수했구나 하고 그냥 마무리 지을 수 있었을 텐데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본인의 위신이 나로 인해 깎였다고 생각했는지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도저히 논리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십대중후반의 나는 영악했고 분위기를 잘 읽었다. 그래서 우는 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논리로 이길 수 없는 상대. 그렇다면 이건 여론전. 모두의 동정을 사기 위해 "저도 부모님 있어요. 우리 부모님이 저 이런 말 듣고 다니는 거 마음 아파하세요." 말하고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소리내어 울었다. 우는 척을 하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서러워졌다. 나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지하철의 그 누구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만 조용히 하면 조용한 지하철을 탈 수 있는데 나 때문에 물 흐린다 여기는 것 같았다. 시선이 무서웠다.
내가 우는 척을 해도 할아버지는 우겼다. 내려서 경찰서에 가자는 둥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 그제서야 앞에 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두둔하며 "할아버지 그만하세요. 젊은 사람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말했다. 아주머니의 말을 물꼬로, 어떤 남자분도 "할아버지! 그만하세요!" 라며 할아버지를 말렸다. 그 뒤 누군가 빌려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지하철을 타고 갔다. 하지만 비참한 마음은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때는 노인들이 미웠다. 자기들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젊을 때는 건강했겠지. 건강한 시간이 있었으니까 쟤도 건강할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근데 나는 아닌데. 나는 장애인이고, 질병인이고, 갈수록 나빠지는 것 외에는 관리하는 수밖에 없는데..... 자기연민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자 이제 그 노인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그때는 그저 밉기만 했던 그 노인들이 이제는 다르게 보인다.
싸우는 것에 아주아주 지친 날에는 나는 나의 힘듦과 장애를 '증명'하기 위해 보란 듯이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말하기도 했다. 너무 힘들어. 장애인인데 티가 안 나잖아, 나는. 갈수록 더 나빠질 텐데 어쩌나. 그렇게 토로하고 있노라면 나를 보던 시선들이 슬금슬금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방법은 좋지 않았다. 몹시 수동적일뿐더러, 부모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일본에서 노약자석에 앉았던 내게 자신의 복지카드를 내밀며 증명을 요구했던 사람은 오히려 산뜻하게 느껴졌었다.
언니와 일본 여행을 갔을 때였다. 언니는 노약자석을 보고 내게 앉으라 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일본인 남성이 내게 와서 자신의 복지카드를 보이며 또박또박 일본어로 말했다.
"이 자리는 노약자를 위한 자리입니다. 당신은 자격이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나는 가슴에 꽃이 활짝 피는 기분이었다. 산뜻했다. 그래서 너무나 반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일본어 전공자로, 일본어를 잘한다.) "네! 저는 장애인이에요!" 그러자 남자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표정이 굳었다. 나에게서 떨어져 먼 자리에 앉아 나와 언니를 모른 척했다. 머쓱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 괜찮았다. 눈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며 네가 뭔데, 라는 듯한 시선을 보낸 것도 아니고,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문제 해결방식이었다. 하지만 언니가 화가 났다. 너도 빨리 장애인 카드 꺼내서 보여주라고 독촉을 해서, 나는 내 장애인 카드를 해맑게 보여주었고 그는 더욱 더 머쓱해했다. 사과는 하지 않았다. 사과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고 내 몸이 힘들어지면서 대중교통을 탈 때에 자리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와 대립하던 그들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들도 노약자석을 노약자석으로 만들기 위해 싸우고 쟁취했을지도 모른다. 초기 지하철에는 자리가 비었으니 앉는 비장애인, 비질병인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약자석이 당연히 약자의 자리라는 인식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때 그들이 여긴 노약자석이라고 말하며 세 칸밖에 안 되는 그 작은 자리를 쟁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싸우고 다닌 시간들이 조금 후회가 됐다. 이야기를 했더라면 좀 더 다르게 흘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나도 방어적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무서웠던 거다. 나를 향해 호통치는 나보다 키 크고 나이 많은 사람이.
그때는 나를 둘러싼 세상이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의 아픈 몸은 어디에서도 적응할 수 없을 거라는 패배적인 생각이 나를 지배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20대의 나는 마음이 조급했고, 함께 나아간다는 생각보다는 파이를 두고 경쟁하듯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닫는다. 인권은 파이싸움이 아니다. 인권은 함께 가는 것이다. 장애인이, 질병인이, 노약자가 복지와 편의를 누릴 수 있게 된다면 그것들은 장애인, 질병인, 노약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의 복지와 편의가 된다.
예로, 가게 앞에 경사로를 설치하면 휠체어는 물론이거니와 게단 이용이 어려운 노인, 눈이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도 편의를 누릴 수 있다. 무거운 물건을 실은 카트도 쉽게 드나들 수 있으니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점이 배가 된다. 최근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영화에 주어지는 한글자막도 그렇다. 청력이 약한 사람이나 청각장애인은 자막을 보고 훨씬 더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외화 더빙이 필요한 이유도 비슷하다. 시력이 좋지 않아 자막을 따라가기 어려운 노인, 시각장애인은 더빙을 통해 영화를 함께 따라갈 수 있다.
나는 우리 사회의 기준이 건강한 몸이 아닌 건강하지 않은 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구를 만들 때, 건강한 몸만 드나들 수 있는 출구를 만드는 것보다 건강하지 않은 몸도 드나들 수 있는 출구를 만들면 자연스럽게 건강한 몸도 그 출구를 쓸 수 있으니 모두의 출구가 된다.
이러한 개념을 '베리어 프리(barrier-free)'라고 한다. 애인, 고령자, 임산부 등 사회적 약자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제거하여 모두가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나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베리어프리는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을 배려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높이를 맞추기 위해 단을 요청하면 그런 배려는 불공정해서 조금 어렵다는 식으로 거절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야 할 책임이다.
책임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겁고 버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와 우리를 위해서 작은 걸음을 내딛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나 역시 누군가의 사려깊은 배려와 도움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타인의 사려 깊은 배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그러니 이 변화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한 베리어 프리.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함께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