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사랑하는 엄마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이야기다. 그때 나는 양쪽 다리를 수술하고 재활치료를 받느라 재활병동에 있었다. 아침 6시부터 시작되어 학교의 1교시, 2교시처럼 쭉 이어지는 치료스케줄을 위해 당시 엄마는 내 곁에 언제나 꼭 붙어 있었다. 잠을 잘 때는 딱딱하고 불편한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웅크려 누워서 잠을 잤다. 아무리 건강한 성인이라도 그런 간병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몸이 병이 든다.
아빠는 엄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게 침대를 같이 쓰라고 했다. 나는 아직 키도 작고 빼빼 마르니 엄마가 침대에서 충분히 함께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매몰차게 엥? 싫어! 하고 소리쳤고, 아빠는 나더러 진짜 못됐다고 했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평도 없었다. 결국 침대는 계속 나의 것이었고, 엄마는 계속 간이침대에서 잤다. 재활병동 생활은 거의 1년 가까이 됐다.
어린 나는 엄마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게 희생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른이 된 지금, 내가 보호자가 되어 엄마를 마주하자 그 당시 얼렸을 적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 중 하나 툭, 유리조각처럼 날을 세우고 튀어나온 기억이 첫 문단에 쓴 저것이다. 그때 나는 왜 그렇게 못됐을까? 아빠 말이 맞았다. 엄마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다른 일로 속 썩인 것이 너무 많아 저 정도는 기억도 나지 않을까.
부모는 자식을 위해 얼마나 희생해야 할까?
세상에 태어나게 한 책임이 있으니, 그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사회는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는 책임일까. 특히나, 질병·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를 기르는 부모는 온전히 그에 대한 책임을 개인들이 감당해야 할까?
엄마는 요즘도 종종 말한다. 희귀난치병인 내 병명을 몰라 이런저런 병원을 돌며 고전하다가 찾아간 세브란스병원에서 의사가 "무식한 엄마" 라며 자신을 비난한 일을. 엄마는 자기 속을 잘 털어놓지 않는 분이지만, 그 말을 듣고 얼마나 황당했는지, 늘 처음 말하듯 그 감정을 토로하시곤 한다. 그만큼 그 말은 엄마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말인 것이다.
나는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의사가 무식하다고, 어쩜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느냐고 엄마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다. 나도 그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다. 젊고 오만한 남자 의사 선생님.
아직 내가 장애를 잘 몰라서 내가 운동하면 내 증상을 개선시킬 수 있냐는 물음에 심드렁한 얼굴로 "그게 장애야"라며 내 기대를 꺾어버린 사람. 내게 장애란 무엇을 해도 변함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잔인한 방식으로 알려준 선생님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선생님이 수술을 잘 집도해준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걷고 있다. 엄마와 나에게 있어 그 선생님이 그냥 무례한 선생님으로 기억되기엔 강렬한 이유 중 하나다.
그 순간에도 엄마와 나는 함께였다. 그때 엄마는 아무 말도 없었다. 만약 내가 엄마와 병원에 갔는데, 주치의가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나는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건 아주 오랫동안 상처받아온 사람의 견디는 방식이었다. 어릴 때는 엄마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많이 부딪히고 마음이 깎여나가도록 아파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게 엄마가 세상과 살아가는 방식이자, 부당함에 맞서는 방식이라는 것을.
어딘가 산 자락의 조용한 나무처럼, 묵직한 바위처럼 그 세월동안 온전히 상처 받더라도 견뎌내기까지 엄마는 얼마나 울음을 속으로 삼켰을까. 어쩌면 그 울음들이 더는 못 참겠다고 시위하며 몸을 점거한 순간, 엄마의 병이 발병한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엄마는 신경외과에서 파킨슨병을 진단 받았다. 언니는 울었고, 나는 덤덤한 척하려 했지만 몹시 동요했다. 엄마는 우는 언니를 보며 웃었다. 얘는, 뭘 이런 걸로 우니.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우리 엄마가 진짜 강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발병한 후에도 엄마는 매일 같이 등교하는 내 아침밥을 챙겨주었다. 걸음걸이가 불편해지고 계단을 내려갈 때는 부축이 필요해졌지만 그래도 엄마는 달라진 게 없어보였다.
그렇다고 나는 착각했었다.
어느 날 내가 만들어준 엄마의 카카오스토리 계정에 들어가보았을 때, 나는 엄마가 올린 한 게시물을 보았다. 익숙한 공원 길, 그곳을 산책하며 엄마는 투박한 셀카 한 장을 찍어 올렸다. 게시물의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자신의 걸음걸이를 보며 사람들이 술 취한 사람처럼 본다. 오해한다.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충격받았던 기억만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질병인이자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내 몸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건강하고 씩씩했던 엄마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과 자신의 몸을 재정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짐작컨대 다시 태어나는 게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까지 내가 할 수 있던 것들을 더는 할 수 없다는 좌절감, 내 노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질병의 흐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나는 늘 엄마에게 미안했다. 다수의 딸들이 그렇겠지만, 내게는 더욱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평생 나를 간병하느라 시간을 쓰고, 말년에는 자신도 병을 얻어 장애인이 된 나의 어머니. 내가 얼마나 무얼 잘한다 한들, 어머니의 희생을 갚을 수 있을 만큼은 못 될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엄마에게 미안하지 않았다. 내가 아픈 게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왜 그때는 모를까. 인간은 너무 어리석고 슬픈 존재인 것 같다.
의사가 엄마를 비난했을 때 엄마는 자신의 잘못으로 내가 이렇게 힘들어했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자식을 방치한 부모가 된 것처럼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애초에 나를 낳았을 때 왜 아이가 아프게 태어났는지, 임신 중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을지도 모른다. (우습게도 이분척추증의 원인 중 하나로 "엄마의 엽산 섭취 부족"을 의사들은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이지 확신컨대 이 모든 것들은 엄마의 잘못이 아니었다. 물론, 내 잘못도 아니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언니에게 그랬듯 철이 들면서부터는 엄마에게도 죄책감을 갖고 살았다. 내가 아프게 태어나서 엄마가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다고 생각했다. 이건 어떻게 해도 내가 피할 수 없는 진실 같았다. 하지만 이제 깨닫는다. 우리 중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우리 중 누구도 지금 벌을 받고 있지 않다. 내가 나의 질병과 장애를 이유로 엄마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면, 그건 사과라 감사다.
이제 나는 엄마가 나를 지켜온 시간만큼, 나도 엄마를 더 많이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