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무렵부터 나는 자주 공상에 빠졌다. 북적이는 대가족으로 살다가 할머니와 단칸방 생활을 시작한 무렵이었다. 친구들과 놀거나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도 했지만, 남는 시간이 정말 많았다. 책은 별로 읽지 않았다. 가끔 학급 문고를 보거나 집에 있던 한 권의 책 "파랑새"를 닳도록 봤을 뿐.
90년대의 티브이 드라마에는 불치병에 걸린 비련의 주인공이나 사연 있는 조직폭력배 같은 인물들이 자주 나왔다. 나는 그런 이야기와 월간 만화 "보물섬"에서 본 이미지들을 오래 간직했다. 내 머리에는 학교 폭력이나 가정불화에 괴로워하다가 끝내 죽어버리는 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흘러넘쳤다.
나는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중얼중얼 이야기를 만들었다. 몇 마디 대화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결말 없이 흐지부지 끝났다가 며칠 후에 비슷한 모습으로 다시 이어지곤 했다. 상상 속 친구를 가져본 적은 없지만 내 마음속에는 항상 울고 있는, 마음이 여리고 자기 파괴적인 주인공이 살고 있었다. 그 서글픈 주인공은 내가 만화책에 빠지면서 더욱 심란하고 복잡한 삶을 살게 되었다. 집에 가기 싫어서 빙빙 돌아 걷던 하굣길, 잠이 오지 않는 밤, 일어나기 싫은 방학의 오전, 두 시간씩 국도를 달리는 시외버스... 나는 늘 먼 산을 보며 마음속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이야기들은 단 한 번도 글자가 되지 못했다. 글자가 되려는 욕심이 없는 이야기였다. 시간이 많이 지났을 때 느꼈다. 그 이야기들은 글자로 쓰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걸. 그건 정말 외로웠던 어린 내 마음,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들의 형체였다. 나는 이 정도면 괜찮은 아이 같고, 부모님과 동생들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불행한 마음이 가득한 걸까? 하는 아주 깊고 오래된, 어쩌면 그냥 그렇게 타고난 마음이 피와 눈물과 슬픔으로 얼룩진 이야기를 만들어 냈나 보다.
아주 예전부터 나는 내 글로 유년의 상처를 치료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나와 같은 아이가 있어서 그 아이가 내 이야기를 읽고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할 수만 있다면. 그게 나의 소원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나의 소원은 아닌,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은 옛이야기가 떠오른다.
오늘 그림책과 글모임에서 내가 정한 주제는
"공상, 상상, 망상"이었다. "한 번도 글자가 되지 못한 이야기"를 주제로 다섯 명이 글을 쓰기로 했다. 작년에 쓴 일기를 다시 보며, 글쓰기를 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