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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Sep 02. 2024

희야와 나

노바소닉, 제이피홀, 프리챌 시절


 희야를 떠올릴 때 확신할 수 있는 건 내가 희야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뿐이다. 희야와의 인연은 ‘제이피홀’이라는 홈페이지에서 시작했다. 수능을 마친 나는 처음 알게 된 온라인 세계에 심취했다. 중학교 때부터 신해철을 좋아해서 넥스트 해체 후 자연스레 노바소닉의 음악에 빠졌고, 김진표가 운영하는 홈페이지 ‘제이피홀’에 우연히 접속해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힙합인(?)들의 세계에도 슬쩍 관심이 생긴 거였다. 20년 정도 지났으니 그때 그 홈페이지 게시판과 채팅방이 어떤 식으로 그리 활발하게 움직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온라인 채팅의 묘미에 푹 빠진 내가 채팅방에서 밤을 지새우다 보니 어느 순간 서울에서 하는 정모에 나가고 싶어 졌달까.



 패닉의 음악과 김진표의 랩을 좋아했지만, 나는 한 번도 힙합과 랩에 푹 빠진 적은 없었다. 정모에는 마이너랄까 인디계에서는 유명한 래퍼들도 많았는데 내 관심사는 아니었고, 그저 호감 가는 몇 명 친구들과 밤새 나누는 이야기가 즐거워서 먼 길이지만 모임에 여러 번 나갔다. 음악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다 보니 모임의 피날레는 언제나 노래방이었다. 노래 잘하고 랩 잘하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구경만 해도 지루하지 않았다. 아무리 멀리서 차비를 들여 찾아가도 회비를 똑같이 받는 서울 사람들이 인정머리 없게 느껴졌지만,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의 인연은 깊어져갔다. 스무 살 시절이었으니까.



 제이피홀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래, 희야 이야기를 시작했었지. 희야 역시 제이피홀 모임에서 알게 된 친구였다. 제이피홀 사람들이 msn메신저와 프리챌 커뮤니티로 인연을 이어갈 때 희야와 친해졌다. 늦은 밤 끊어질 듯 끊이지 않는 채팅을 이어가고 고고레이싱이라는 슴슴한 게임을 하면서 오만가지 이야기를 다 나누었다. 희야는 한 번도 없었던 남자사람친구였다. 희야는 나의 솔직한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준 여러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린 마음으로 내 입장을 귀담아 들어주었다. 나는 희야에게 남자친구에 대한 고민부터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까지 털어놓았다. 희야 역시 여자친구에 대한 상담이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나에게 편히 털어놓았다. 우리는 서로 멀리 살았고, 제이피홀의 인연들 외에는 겹치는 지인이 하나도 없어서 뭐든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희야는 겨울 새벽을 좋아했다. 밤새 답 없는 문제로 끙끙 괴로워하며 이제 그만 다 그만두고 싶을 때 패딩을 걸쳐 입고 차가운 밖으로 나가서 정처 없이 걷는 아이였다. 거리를 헤매듯 걷고 담배를 피우고 공부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했다. 가정사가 복잡해 보였지만 좀처럼 본인 일에 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하기 힘든 일에 대해 묻는 게 실례가 되는 질문인 줄 몰랐던 그때의 나는 집요할 정도로 희야가 말하지 않는 비밀을 캐내려 했었다. 1년에 한 번 정도 만나고 채팅과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일 뿐이었지만, 늘 나 혼자 너무 많은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생각에 희야가 말하지 못하는 상황을 하나라도 더 알아내고 싶었다. 희야를 향한 애정이기도 했고 독점욕이기도 했던 내 마음이 이제야 문득 희야에게 미안하다. 내가 희야를 알고 싶어 하던 욕심은 나무를 다 알고 싶다고 모든 가지가 앙상해질 때까지 나뭇잎을 하나하나 다 뜯어내버리고 싶은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았다. 내 어리석음을 희야가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희야 역시 어렸고 친누나 대하듯 나를 좋아했으니까,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슬쩍슬쩍 돌려가면서 오래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희야와의 인연은 오래 이어졌다. 내가 취직했을 무렵에 희야는 대구까지 내려왔다. 돈을 벌면서 부쩍 어른스러워진 기분으로 나는 희야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커피도 같이 마셨다. 소설 이야기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상대였던 희야에게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내가 쓴 팬픽도 보여줬다. 이제와 떠올려보면 희야는 내 글을 좀 우습게 여긴 것 같았는데, 그래도 한심해하는 티를 내지 않고 “누나는 시를 써 봐.”라고 진지하게 말해주곤 했다. 프리챌 커뮤니티에 어쩌다가 한 번씩 올리는 희야의 글은 멋있었다. 멋있었지만 절대 자주 올리지 않았다. 아마도 희야는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고 혼자 글을 쓰는 아이였거나, 시작한 글을 하나도 마무리하지 못하는 아이였을 것이다. 작가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아는 게 많고 똑똑한 희야는 잘난 체하지 않았다.


 커뮤니티에서 잘난 척하며 나를 무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같이 욕하면서 우리는 더 돈독해졌다. 제이피홀에서 시작한 커뮤니티에서는 사랑과 전쟁 같은 일도 심심찮게 많이 벌어졌는데, 우리는 자폭하는 그들을 비웃으면서 고고레이싱을 하느라 긴 세월을 보냈다.

 커뮤니티의 흔적은 점점 사라져 가고 희야와 몇 명 친구들과 인연을 이어가던 20대 중후반에는 내가 서울에 올라가 논 적이 있었다. 우리는 서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홍대 앞에서 술을 퍼마셨다. 그야말로 시시껄렁한 이야기들만 하면서도 굉장히 즐거웠던 것 같다. 내가 혼자 서울에 공연을 보러 갔을 때는 고속버스 첫차 시간 전까지 희야와 영화를 봤고, 그 후에는 서른쯤 되었을 때 홍대 앞에서 점심을 한 끼 먹었다.

 우리는 가끔 채팅하고 문자와 전화도 주고받았지만, 연락의 간격은 점점 더 넓어졌다. 메신저도 프리챌도 고고레이싱도 모두 지난 세월로 사라졌다. 어쩌다 한 번씩 연락하면 ‘너랑 채팅하던 시절이 그립다.’, ‘누나랑 고고레하던 시절이 좋았어.’할 뿐, 서로 만날 약속을 잡는 일은 없었다.

 희야의 삶이나 내 일상이 서로를 떠올리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져 흘러가다가 내가 결혼 준비로 정신없던 시기였다. 밤늦게 좀처럼 먼저 연락하지 않던 희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누나가 선택한 게 뭐든 행복해야 해. 축하해.” 프로필에 올린 웨딩사진을 보고 연락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우리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나의 길고 찌질한 연애사를 다 아는 희야는 말했다. “보통 오래 연애하고 헤어지고 나면 선을 보고 일찍 결혼하더라.” “나도 그러려고.” “누나는 할 수 있을 거야.” “결혼해서 완전 잘 살아야지.” 나의 찌질한 과거가 내 프로필 사진을 확인할 거라는 확신으로 잘 나온 웨딩사진을 매일매일 바꿔가며 올리던 참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지 않을 희야의 걱정 어린 축복에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희야도 누군가와 마음 편하게 살기를, 사는 게 너무 괴롭고 무겁지 않기를 바라면서, 잘 살라는 인사를 했다.



 먼저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의 연락처를 정리할 때 나는 희야의 연락처를 지웠다. 희야가 궁금하고 여전히 희야를 아꼈지만, 항상 먼저 연락하는 쪽이 나여야만 하는 관계는 하나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미련 없이 지웠다. 노래를 잘하고 책을 많이 읽던 희야, 부디 그 후 뭐라도 쓰면서 잘 지내고 있기를, 어떻게든 한 번쯤은 소식을 알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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