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와 목욕탕에서 만나고 돌아와 모욕감과 서글픔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니? 대체 너는 뭐가 그렇게 잘 났니? 성실한 직장인이고 좋은 남자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에 앉은 사람이랑 눈도 잘 못 마주치는 사회성 떨어지는 남자잖아.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런 말을 네 얼굴 앞에서 하지는 않잖아. 지나야, 그리고 니가 취직하지 않고 다른 대학에 편입해서 공부하는 게 그렇게 잘난 일이니? 나는 지나에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반격하기에는 내가 지나를 아낀 세월이 너무 길었다. 본래도 나는 친구 기분 나쁜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무엇보다 타이밍도 놓쳤다. 그 자리에서 하지 못한 말들이 곪아갔고, 정은네 집에 모여 월드컵을 보자는 지나의 문자를 짧게 거절한 후에는 계속 지나를 피했다. 지나와 나, 은수와 정은으로 오래 뭉쳐있던 네 명은 더 이상 네 명이기 힘들어졌다. 나에게 할 말 못 할 말이 없던 지나였지만, 왜 내가 자신을 피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월드컵이 끝나고 한여름도 지났을 무렵, 나는 정은에게 연락했다.
지나는 정은에게 나에 관해 물었다고 했다. 진이는 연락이나 만남을 피하던 아이가 아닌데,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아무래도 걔가 나에게 굉장히 서운한 일이 있는 모양이라고 걱정하더라고 했다. 언제나 정은의 선택을 슬쩍슬쩍 비웃고 내 앞에서 뒷담화도 넘치도록 한 지나였지만, 막상 나와 문제가 생기니 정은에게 이야기를 꺼낸 점이 우스웠다. 나는 마음에서 지나를 털어내기 위해, 정은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 위해 지나에게 받은 상처를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부쩍 잘난 척하던 지나는 정은에게도 거슬린 지 한참이라, 지나를 욕하며 정은과 나는 친밀해져 갔다. 정은 역시 나와 남자 친구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와 지나가 절친인 걸 아는 주변 친구들 모두에게 알렸다. 나는 지나와 헤어졌노라고, 지나는 이제 내 절친이 아니라고. 서너 번 같은 이야기할 때쯤에는 연설처럼 구 절친의 뒷담화를 하고 다니는 자신의 비열함에 몸서리가 쳐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오랫동안 자기혐오가 깊었던 나는 저열한 자신에게 쉽게 적응했고, 상처받은 내 마음에 심취했다.
지나가 뭐라든, 미래가 있든 없든, 내 연애는 끝나지 않았다. 지나를 만나지 않고 그 해가 끝났을 때 정은과 은수가 네 명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나에게 기죽고 싶지 않아서 새로 티셔츠를 사 입었다. 모처럼 학교 앞 술집에서 만난 우리는 잠깐 어색했지만, 곧 마주 보며 깔깔 웃기도 했다. 지나가 내 마음에서 충분히 멀어졌기에 거리를 두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만 나누며 놀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지나가 어떤 마음으로 지냈는지는 하나도 모른다. 관심도 없었다. 아마 지나에게는 얼마 남지 않은 친구인 우리가 문득 중요하게 느껴진 때가 있었겠지, 싶을 뿐. 학교에서 새로 사귄 편입생 친구가 굉장히 마음에 드는지 지나는 그 애 이야기를 할 때 즐거워 보였다. 자신과 비슷한 진로를 택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그 애는 나처럼 한심스럽지 않았겠지.
다음 해 은수가 결혼 준비를 시작할 때쯤부터, 우리는 또다시 자주 모였다. 즐거웠다. 미우나 고우나 스무 살부터 십년지기인 우리들은 서로를 잘 웃겨주었다. 어느 날 모임이 파하고 집에 가는 길에 정은이 말했다. “지나가 아직 궁금해하더라. 네가 지나에게 서운한 이유 말이야. 내가 자세히 대답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냥 간단히 대답했어. 지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이는 남자 친구를 좋아할 수도 있다고. 놀라는 눈치더라.”
다행스럽게도 이후 지나 삶의 행보가 내 눈에 그리 대단하지 않았고, 정은의 말대로 나에게는 연애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친구들의 의견은 나에게 별 힘이 없었다. 지나 말대로 답 없는 나의 연애는 점차 더 미래를 잃어가고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지나와 관계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지나에게 남자 친구가 생기기 전까지 오랜 시간 셋이 함께 놀았던 추억도 많았는데, 그런 시간도 전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 지나가 결혼 소식을 알렸다. 정은과 은수는 여전히 절친이었지만, 은수가 결혼과 동시에 서울로 이사했기 때문에 예전 같을 수는 없었다. 정은이 한 번 크게 아팠던 것을 계기(난 예전부터 아픈 사람에게 몹시 약하다)로 나는 정은과 점점 더 친해졌다. 정은이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고 마침 사는 동네가 가까워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정은은 난임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지나의 결혼 직전 볼썽사나운 이별을 한 나는 선을 보고 결혼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다. 정은과 나는 만날 때마다 자연스레 지나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웨딩사진을 찍고 결혼식을 올리는 사이 반짝 친구들을 찾던 지나는 결혼 후에 다시 공부에 집중하는 모양이었다. 이때 열린 정은과 은수와 나의 카톡 단톡방은 오늘까지도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나는 지나를 잊을 수 없었다. 어떤 고민이든 자기 일처럼 진지하게 나눠주고, 누구보다도 솔직하던 지나. 지나간 인간관계를 나만큼 곱씹고 자신의 마음을 깊게 들여다볼 줄도 알았던 지나. 지나와 나는 결정적인 삶의 방향성 추구가 달랐는데, 이를테면 지나에게 필요한 건 '남들에게 인정받는 번듯한 직업을 갖추고 비싼 브랜드 제품을 사면서 살아가는 예쁜 여자‘라는 타이틀이었다. 나 역시 물론 그런 성공 요소에 욕심 없는 초연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우선은 내 정신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하루하루 먹고살며 견디는 것 이상의 열정이 없었다. 나의 그런 면이 지나의 속을 뒤집었을 테니, 갑갑하기도 했겠지.
지난한 연애가 끝나고 반년도 더 지났을 때 나는 지나에게 연락했다. 토요일 오후에 금호강을 건너는 다리를 걸으면서 몇 번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도서관에 있다가 전화를 받은 지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너무나 오랜만이라고, 반갑다고 했다. 나는 모처럼 용기를 내 솔직히 말했다. “너랑 모르는 사람처럼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았어. 어디서라도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고 싶어. 언제 커피라도 한 잔 마시자.” 지나는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설국열차가 개봉했을 때, 우리는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예전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불편하지도 않았다. 지나는 좀 특이한 남편의 성격을 나에게 털어놓았고, 나는 헤어진 사연과 소개팅과 선을 본 사연을 나누었다. 사는 건 참 별 볼일 없었다. 반드시 고민이 있었고, 좋은 일은 별로 없었다. 이후에 나와 지나는 자주 만났다. 커피도 마시고 성형외과 상담도 같이 가고(수술은 결국 하지 않았지만) 집안 문제도 서로 털어놓았다.
사람들이 안 좋았던 일을 말하지 않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내 말에 지나는 '말하고 떠올릴수록 더 괴로워서 그런 거 아닐까?’라고 대답했다. 그랬다. 나는 항상 바닥까지 내려가고도 올라올 줄 모르는 고민의 구덩이에 빠져있었고, 지나는 구덩이를 어떻게든 틀어막고 성공을 향한 노력에 빠져있었다. 대화가 반복되면서 지나는 나의 고뇌를 ‘이미 자기는 겪고 지나온 일‘이라고 느끼는 듯했고 자연스레 말투에서 나를 위로하며 가르치는 기색이 묻어났다. 지나가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선생님이 되었을 때, 나는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길고 긴 전화 통화를 나누며 지나는 자기 집에 놀러 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해서 날짜를 잡았지만, 매번 지나가 약속을 취소했다. 나 역시 그렇게 적극적으로 지나를 만나러 먼 길 가고 싶지 않아서 크게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해 가을, 내 결혼식 전날 지나는 전화를 걸어서 횡설수설하는 사연으로 결혼식에 오지 못하겠다고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지나가 오든 말든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결혼식 후에 지나는 축의금을 보냈고,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지나의 축의금으로는 사고 싶었던 운동화를 샀다.
그 후로 10년이 지났다. 지나가 몇 번 떠올랐지만, 결혼과 동시에 많은 과거를 정리하기로 한 나는 지나의 연락처와 카톡 프로필까지 삭제했다. 언제든 연락이 온다면 반가이 받겠지만,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은수와 정은이 있는 카톡방에서 가끔 지나의 프로필 사진을 보곤 한다. 절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했던 지나였지만 몇 해 전 딸아이 사진을 올렸다. 요즘은 담임을 맡은 중학생 아이들과 단체 사진이 프로필에 올라와 있다. 작은 사진 안에 들어있는 지나의 얼굴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어느 동네에 있을지, 우리 동네 학교에 혹시나 부임할 일이 있을지 가끔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