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스타일에 귀여운 얼굴, 똘똘해 보이지만 맹한 면이 있어서 깜찍한 헛소리를 자주 하던 지나. 지나와 나는 키가 비슷했는데 몸무게는 10킬로그램 가까이 차이가 났다. 날씬하다는 말도 제법 듣는 나였지만, 지나 옆에 있으면 언제나 덩치가 크게 느껴졌다. 지나는 그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인터넷쇼핑몰의 모델처럼 44 사이즈를 입을 수 있는 아이였고, 응당 그럴 나이이기도 했지만 유난히 패션과 유행에 민감하고 스타일이 좋았다. 옷 가게에 가면 언니언니 하며 말을 턱턱 놓는 점원들에게 주눅 들어 어버버 하는 나와는 정반대로, 언니들에게 반존대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흥정도 할 수 있었다. 남자들에게 인기도 있었고, 집에 돈도 좀 있던 지나였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다를 바 없이 자신감 없고 고민 많은 어린 여자아이였을 뿐이라는 깨달음은 정말 최근에 들어서야 얻었다.
고만고만 유복하고 고민 없어 보였던 무리에서 혼자 사회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나는 늘 조금 겉도는 편이었는데, 친구의 남친이던 민호 선배의 비밀 연인이던 그 겨울에 지나 역시 밝은 세상인 무리에서 한 발짝 크게 떨어져 나온 것이 우리가 가까워진 계기라면 계기였을 것이다. 한두 살 많다고 군대처럼 기강을 잡으려들던 선배들을 싸잡아 욕할 때 유난히 거침없던 나의 언행이나 과감한 솔직함도 지나의 마음을 끌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나라면 무리에 속한 다른 여자애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평상시 내가 비밀을 잘 지키는 과묵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친구가 울먹이는 얼굴로 '비밀 지켜줘.'라고 말하는 걸 외면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니었으니 지나의 선택이 나빴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었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우리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지나는 나의 우울함과 무기력함을 나눠주었고, 기꺼이 힘이 되어주려 노력했다. 우리는 대안 없이 견뎌야 할 전공 수업과 학과 생활, 각자의 복수 전공, 가족들과의 문제와 수 차례의 연애를 함께 거치면서도 별로 어긋남이 없었다. 졸업반 즈음에 내가 한 차례 휴학하고 지나는 연락처를 바꾸었는데, 그때도 나에게만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다른 애들한테는 나랑 연락한다고 하지 말아 줘.' 지나는 더욱 나에게 특별한 친구가 되어갔다.
지나와 나는 술을 사주는 복학생 선배들과 같이 어울려 놀거나, 몇 시간씩 거리를 헤매며 산책하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계절과 시간을 따지지 않고 걸으며, 살아온 시간 동안 떠올린 거의 모든 생각을 나누었다. 때로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나누는 참회이기도 했고, 때로는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고 품었던 은밀한 감정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못할 말이 없었다. 지나는 내가 가난한 나 자신을 희화하는 점을 좋아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나를 제외한 우리 중 그 누구도 가난한 집 딸이 아니었지만 하여간 그렇게 느낀다고 했다. 남자들이나 선배들 앞에서 내가 그깟 깡촌에 있는 조그마한 과수원 나부랭이 따위라고 말하면 다들 웃었지만, 지나는 그런 내가 대단하다고 했다. 약점을 숨기거나 예뻐 보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점이 그렇다는 뜻이었겠지만…. 내가 그렇게 센 척하며 열등감을 애써 숨긴다는 건 지나도 잘 몰랐을 것이다.
삶이 달라지면서 우리 관계도 끈끈함을 조금씩 잃어갔지만, 지나를 향한 나의 깊은 애정은 줄어들지 않았다. 학원에 취직한 나도 바빴지만, 공부하느라 일상이 바빠진 지나가 연락하면 열일 제쳐두고 만나려고 애썼다. 지나와 절친이라고 느낀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지나의 험담을 하지 않았다. 인간관계에서 뒷담화가 없을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나이지만, 험담에 단 한 가지 룰이 있다면 '돌려 막기‘는 금지. 뒷담화는 한 방향으로만 해야지, 내가 지나에게 은수와 정은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시 은수와 정은에게 지나 욕을 하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정은이 백수인 내 남친을 한심해했다고 지나는 나보다 더 열을 냈다. 사실 정은은 내 바운더리 안에 들어온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는데(사실 나도 정은의 남편을 좋아하지 않았고), 지나가 흥분하며 정은를 욕해서 나 역시 정아에게 정이 떨어지기도 했었다.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헌신적인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지나는 달라졌다. 자신감을 얻었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오랜 시간 짝사랑과 헛발질 같은 만남을 반복해 온 지나에게 지나만 바라보는 건실한 남자친구의 존재는 굉장한 위력이었다. 늘 나를 걱정하던 지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노골적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같이 목욕탕에 간 지나가 '미래가 없는 직장과 역시 미래가 안 보이는 나의 남자친구'를 염려하는 말을 시작했다. 친언니였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 걱정들. 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요약하자면 이런 이야기였다.
“너는 아직도 학원 강사고 걔는 아직도 그렇게 지내고 너네는 어떡하려고 그러니? 둘 다 그렇게 답이 없다면 헤어지고 너는 선을 보는 게 어때? 요즘 너 살쪘니?”
어느 순간부터 '노는 시간이 아깝다.'라고 자주 말하던 지나는 그날 목욕탕에 갔다가,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남친을 불러서 집에 갔다. 나는 멍하니 지나에게 들은 말을 곱씹다가 집에 갔다. 이제 지나와 나는 끝이었다. 나를 불쌍하고 한심하게 여기는 아이와 친구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