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집으로 이사한 봄, 카페마다 인테리어로 귤나무(때로는 유자나 레몬) 화분을 키우는 것이 유행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플로리스트들의 계정에도 반드시 올라오던 귤나무. 투룸에서 키우던 칼리데아 프레디가 죽어서 휑하니 넓은 거실에는 화분이 하나도 없었다. 친구의 자수 선생님과 친분이 있는 (그러니까 잘 모르는 사이) 꽃집 사장님이 올린 귤나무 사진에 "저도 귤나무 기르고 싶어요. 하트하트" 댓글을 달았더니 바로 메시지가 왔다.
당장 산다는 뜻으로 한 말도 아니었고 8만 원이라는 가격에 움찔 놀랐지만, 이 정도도 못 살까 싶어 흔쾌히 주문하고 먼 동네까지 가서 귤나무 화분을 데려왔던 게 벌써 10년이 다 되었다. 얼떨결에 키우게 된 귤나무 화분은 우리 집에 오자마자 이파리를 다 떨구고 앙상해졌었지만, 해가 잘 드는 집이라 그런지 곧 기운을 찾아 새잎을 밀어냈다. 꽃이 피고 한글 자판 이응 크기만 한 열매가 맺어 앵두만큼 자라났다. 방울토마토 크기에서 귤색으로 다 익은 걸 보니 새삼 금귤인가 싶었는데, 내게 귤나무를 팔았던 꽃집 사장님도 정확히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껍질이 얇고 씨가 많은 동그란 귤은 쓰고 떫고 셨지만, 다른 식물들이 머물다 떠나고 살다가 죽어도, 귤나무는 오늘도 내 곁에 있다.
귤나무 이전에 남편의 동료들이 집들이 선물로 준 스투키와 산세비에리아 화분이 베란다에 있었는데, 과한 습도로 죽기도 했고, 두껍고 뾰족뾰족한 잎이 끝없이 돋아나는 모습이 동물처럼 느껴져 뽑아버리기도 했다. 페페와 초코민트와 애플민트, 로즈메리와 라벤더 모종을 사서 분갈이하고 정성껏 돌보았지만 누렇게 말라죽었고, 생명력이 폭발하듯 새잎이 돋아나고 가지가 구불구불 뻗어나가는 장미 허브만이 살아남았다. 상추와 풋고추를 잠깐 기르던 큰 화분으로 옮긴 장미 허브의 넘쳐나는 줄기를 가지치기해 잘 돌봤으면 좋았을 것을, 괴팍한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뽑아버렸다. 우글우글 번져나가는 가지와 잎이 징그럽고 무서웠다는 게 식물을 뽑아버린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동네 꽃집에서 가끔 장미 허브를 마주치면 쓰레기 봉지에 넣고 나서도 풍기던 향기가 떠올라 죄책감이 살아난다. 산 식물을 그렇게 버린 후에는 새로 화분을 들이지 않았다.
내가 그린 귤나무
귤나무가 우리 집에 오고 두 해가 지나 아이가 태어났다. 귤나무 화분에 물을 주다 보면 앉지도 못하는 아기와 단둘이 보내던 첫겨울이 떠오른다. 그해 겨울, 산후 우울증인지 분노 장애인지 뭔지를 극복하기 위해 온라인 수업으로 명상을 배웠다. 생각을 흘려보내는 일은 불가능의 영역이었으나,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가사와 육아에서 단 몇 초라도 벗어날 공간을 찾아야 했다. 딸각거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뜰 아기와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나를 위해 식탁에 실리콘 매트를 깔았지만, 아기가 곤히 잠들어도 식탁에서 차 한 잔 마시기 쉽지 않았다.
분유 포트에 든 따뜻한 물로 인스턴트커피를 한 잔 타서 안방 베란다로 갔다. 심호흡을 하며 커피를 마셨다. 귤나무의 반짝이는 이파리와 잎보다 몇 배 더 짙은 초록색 열매를 빤히 바라봤다. 오른쪽 가지에 맺힌 열매가 자라나는 동시에 왼쪽 우듬지에는 꽃봉오리가 맺히곤 했다. 화분에 심긴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 같지 않았지만, 계절 상관없이 피우는 꽃과 열매가 그저 반가웠다. 한겨울에도 한 송이씩 피어나는 하얀 귤꽃의 달콤한 냄새에 섞인 인센스 스틱 향에 집중하려고, 호흡하는 순간에 머물러보려고, 과거를 곱씹지 않으려고 애썼던 날들이었다.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고, 눈물이 날 때에는 귤나무 앞에 가자. 여기가 내가 쉴 자리, 내가 바라볼 자리야.’ 눈을 보기 힘든 지역이지만, 그 겨울에는 베란다에서 함박눈도 몇 번이나 보았다.
귤나무는 내 변덕에 따라 작은 방에 들어왔다가 거실에서 지내다가 다시 베란다로 옮겨갔다가 했다. 몇 해 전부터 한겨울에만 거실에 들이고 다른 계절에는 베란다에서 지내고 있다. 집안에 들어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꽃봉오리가 부풀어 오르는데, 한두 송이만 피어나도 거실에 향이 가득하다. 귤나무보다 어린 내 딸은 꽃과 열매를 먼저 발견하고 나에게 알려준다. 맛없는 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는 열매를 따려고 하지도 않아서, 잘 익은 열매는 집에 놀러 온 어린이 손님이 꼭 따보고 싶어 하면 하나씩 딴다.
허브가 떠나고 빈 화분들은 그대로 한참 비워두었다가, 아이가 유치원에서 받아온 해바라기와 나팔꽃 씨앗을 심었다. 새싹은 씩씩하게 올라오다가 곧 비실비실 웃자라다가 죽어버렸다. 풀이 죽은 자리에 친한 언니가 나눠준 제라늄을 심었더니 가운데에 연분홍이 맺힌 흰 꽃이 무더기로 피어났다. 효능이 좋다는 식물 영양제를 사서 귤나무와 제라늄에 아낌없이 뿌려주었다. 봄이 되자 빈 화분을 다 채우고 싶어진 나는, 아이와 남편이 먹지 않아 잡곡 통에서 꺼낸 검은콩 한 움큼을 싹 틔워 심었다. 영양제를 주어서인지 새싹들이 쑥쑥 잘 자랐다. 화분 한구석에는 죽은 줄만 알았던 나팔꽃 줄기가 삐죽 솟아났다. 콩잎과 비슷해서 못 알아볼 뻔하였으나, 피어난 보랏빛 꽃이 씨앗 봉투에 있는 나팔꽃과 똑같았다. 검은콩도 여린 잎과 줄기가 제대로 살까 싶었지만, 야무지게도 블라인드 줄을 휘감아 자라고 있었다.
엄마에게 얻어온 천리향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큰 토분이 비어 귤나무를 분갈이할지 몇 번이나 망설였는데, 괜히 손을 댔다가 귤나무를 죽일까 봐 천리향만 뽑아냈다. 4월에 장터에 꽈배기를 사러 갔다가 방울토마토 모종을 세 개 사 왔다. 큰 화분에 모종을 심었더니 콩나물처럼 잘 자랐다. 달랑 두 개 열린 토마토가 달고 맛있었다. 그 후에도 샛노란 별 모양 꽃들이 제법 피었는데 열매는 잘 맺히지 않고 꽃만 졌다. 아무래도 고층 아파트 베란다라서 그런 것인지, 단지 내가 잘 못 길러서인지 알 수 없다. 집에 토마토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열매에 크게 욕심도 없다. 그저 잘 자라는 게 좋아서 지켜보았더니, 두 그루가 천장에 닿도록 자라나 키 큰 해바라기처럼 높이서 꽃이 피었다.
매일 같이 들여다보지도 않으면서 베란다에 화분이 있고, 그 화분에 싱싱하게 사는 식물들이 있다는 사실에 흐뭇해한다. 대충 마른 흙에 물만 주다가 모처럼 베란다 바닥을 물청소하고 마른 가지와 꽃을 다듬었다. 너무 촘촘하게 맺힌 귤열매를 솎아주고 휘청이는 작은 토마토를 지지대에 기대주었다. 따라온 아이의 다리에 물을 뿌려주었더니 까르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