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에서 멀어진 아영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제 애들 모일 때 나한테 꼭 연락해 줘.” 나는 알겠다고 답장했지만, 아영을 모임에 부를 생각은 없었다. 며칠 후 카페에서 지나와 정은과 은수가 모였을 때 아영의 메시지를 전하긴 했다. “아니, 지가 언제부터 나한테 따로 친한 척했다고 그래? 왜 너네한테 직접 말 안 하고 나한테 말하는 거야? 내가 뭐 대신 전하기라도 바라는 거야?” 친구들은 까르르 웃으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언제부터였을까? 아영 없이 우리 넷이 만나는 게 편해진 건. 정은은 본래 아영과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아영과 나는 1학년 때만 해도 하굣길에 버스를 같이 타는 친한 사이였는데, 아영과 은수는 해외여행도 같이 다녀왔는데, 지나는 아영과 한때 참 친했는데, 사실 나도 정은과 은수를 따로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는데…. 아무튼 졸업반을 앞둔 우리에게 아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대학 1학년 때 우리는 한 무리였다. 때에 따라 다른 여자아이들이 더 있거나 한둘이 빠지거나 했지만, 함께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고 시내에 놀러 가는 사이였다. 아영이 입학 직후부터 2학년 민호 선배와 사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선배의 자취방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남자는 한 명뿐이었지만, 살짝 청춘 시트콤 기분을 내면서 틈만 나면 와글와글 몰려 놀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볼링장과 당구장에 갔고, 고등학교 때보다 더 자주 시내 옷 가게에 따라다녔다. 다들 용돈을 두둑이 받아 쇼핑하고 외식하고 노는 것에 거리낌 없는 친구들 사이에서 기가 죽었지만,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라도 어울리고 싶은 재미있는 그룹이었다. 1학년 내내 별일 없이 평온한 무리 생활(인사를 안 한다는 둥, 버릇이 없다는 둥, 꼰대 선배들에게 욕을 먹고 공격당하기도 했는데, 그 덕에 우리끼리는 더 친해졌다.)이 이어졌는데,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 지나가 내게 비밀을 털어놓는 바람에 갑자기 내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느껴졌다.
“민호(아영 남친인 선배의 이름,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했단다)가 나를 좋아한대. 나도 민호를 좋아해. 비밀 지켜줘.” 선택해야 했다. 내 친구는 지나인가, 아영인가. 제일 먼저 묻고 싶었던 건 ‘왜 민호 선배 따위를 좋아하느냐?’였지만, 지나가 울면서 말했기 때문에 영영 질문하지 못했다. 비밀을 지키면서 지나의 대나무숲이 된 나는 본능적인 흥미와 도덕관념, 우정과 사랑 등을 저울질하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몇 달 후에 군대에 간다는 민호 선배는 표면적으로 아영과 잘 사귀고 있었는데, 지나 말로는 본인과는 이미 잤다고 했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나 싶었지만, 지나의 우는 얼굴이 또 너무 슬퍼서 또 별말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며 또 담배를 피웠다. 선배는 지나를 부모님이 안 계신 본가에 데려가고 비싼 코트도 사주었다고 했다. 지나와 아영이도 내 기준 부잣집 딸들이었는데 민호 선배의 부모는 상당한 부자라고 했다. “선배가 진짜 사랑하는 건 나.”라고 말하는 지나의 말을 들을 때는 조만간 아영과 헤어지고 지나와 민호 선배가 공식 과 cc가 되는 걸까 싶었지만, 어이없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군대에 있는 선배가 아영과 여전히 헤어지지 않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대학 2학년 초여름, 점심시간에 전화를 받은 아영은 선배가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군에 있으니 불안해서 돌아버리겠다며 아영에게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다는 소식에 우리는 경악했다. 본디 찌질한 성격이던 민호의 불안은 입대 후에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테고, 틈만 나면 아영에게 전화해 징징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영 옆에서 숟가락을 들고 앉아 “미친!”이라 외치고 저녁이면 내 앞에서 슬퍼하는 지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내 일과가 되어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선배는 지나와 사귀지도 않을 거면서 사랑 운운하며 몇 번이나 잠자리했고, 키스 이상은 허락하지 않는 아영과는 헤어지지 않고 역시 사랑 운운하며 더욱 매달렸다. 이런 자명한 상황에 지나는 좌절 하다가 끝내 혼자 관계를 정리하고 끝내야 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지나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고, 여자애들의 무리는 깨어지지 않았다.
아영과 선배는 오래 사귀었다. 선배가 제대하고, 새로운 자취방에 살 때에도 우리는 자주 어울려 놀았다. 1학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3학년이 되어도 우리는 계속 우리였다. 그동안 지나와 나는 여느 여자애들처럼 연애도 하고 짝사랑도 하고 소개팅도 하면서 지냈다. 진로와 복수전공이 각자 달라지고 마침내 아영도 민호 선배와 헤어졌을 무렵, 나는 지나와 뗄 수 없는 절친이 되어있었다. 아영과는 점점 멀어져서 가끔 공강 시간이 같을 때나 보는 사이가 되었다. 아영과 같은 연구실에 들어간 은수가 아영과 충돌이 생기면서, 은수가 하는 아영의 뒷담화(강약약강이 지나치고 가식적인 면)가 지나와 나에게 공감을 얻으면서, 결정적으로 아영이 평판 최악인 복학생 선배와 사귀게 되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더 멀어졌다. 지나와 나, 은수와 정은은 그렇게 넷이 되었고 우리는 순조로운 4인방으로 잘 지냈다. 그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 어느날 밤 메신저로 아영이 나에게 연락한 거였다. 다시 우리 모두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듯이.
내가 아영의 연락을 비웃어버린 까닭에는 지나와의 신의가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내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다. 걔들은 그런 적 없다고 하겠지만 어쩐지 나는 그 무리에서 들러리나 별책부록처럼 취급당한다고 느꼈다. 내 자의식 과잉과 가난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지만, 민호 선배가 공공연히 나를 무시하고 놀릴 때 아영도 동의하는 듯한 기색(선배가 내 옷차림을 지적하면 같이 웃는다든지)을 여러 번 보였기 때문이다. 싹수없고 철없는 부잣집 것들이 나와 지나를 가지고 놀아? 나 혼자만의 확대해석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민호 선배는 한 번도 내 마음에 든 적이 없었고, 바보처럼 속으면서도 모르는 아영도 점점 우스웠다. 그러니 모처럼 연락해서는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대뜸 나를 친구들 사이의 오작교로 쓰겠다는 아영의 심보가 꼴 보기 싫었고, 지나가 아영을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며, 은수가 느끼는 아영에 대한 미움도 자잘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 후에 아영이 나에게 연락해서 물었던 것 같다. 왜 내 부탁을 씹고,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했는데 서운하다고 하는 메시지를 받았지만 나는 여전히 미안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건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달라고 하지 말고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지 그러느냐.”라고 기가 막혀 했던 내 모습뿐이다.
한 달쯤 지나서 지나가 어이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뒤에서 누가 반갑게 인사하기에 돌아보니 아영이었다고. 활짝 웃으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는데 당황스럽더라고 했다. 지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아영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정말 아무것도.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은수와 정은과 셋이다. 아영의 안부는 졸업 후에 거의 듣지 못했고 그렇게 친하던 지나와는 10년 더 절친으로 지내다 복잡한 사연 끝에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