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불리 분유를 먹고 얌전히 안겨 꼬물거리다가 졸려서 눈이 감기는 아기 여름을 안고 있는 선생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아기들은 원래 보채고 징징 우는 거 아니에요? 여름이는 이른둥이라 그런 걸까요? 계속 잠만 자는데?"
"내가 조리원에서도 오래 일했는데, 태어나고 얼마 안 된 아기들은 잘 먹으면 바로 잘 자요. 시간이 좀 지나면 이제 보채고 울고 시작하는데, 여름이는 일찍 나온 만큼 신생아 시기가 좀 길겠지요. 잘 먹고 잘 싸는 거 보니까 걱정할 거 없을 것 같아요."
잠깐 사이 아기는 선생님의 무릎에 기대서 푹 잠들어 있었다.
"정말 귀엽죠? 얼마나 예뻐요? 아기들은 금방 쑥쑥 자라니까 요렇게 기대서 잠들 수 있는 날은 참 짧거든요. 근데 여름이는 조그마하게 태어났으니까 지금도 요렇게 재울 수가 있네. 잠든 모습을 봐요. 천사 같지요? 내가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다니는 교회에서 들었어요. 천국에 들어가려면 이런 아기처럼 티끌도 묻지 않은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잠든 아기의 작고 동그란 얼굴을 쳐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젖병을 빠느라 부르텄지만 벌어진 입이 사랑스러웠다. 긴 속눈썹과 작은 코, 가느다란 머리카락까지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아기의 건강이나 정상 발달 여부를 염려하지 않았다. 사랑스럽고 작은 내 아기 여름.
예정일보다 5주 빨리 1.83킬로그램으로 태어난 아기 여름은 태어나자마자 니큐(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온갖 검사를 하고 링거를 맞아야 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분유를 먹을 수 있었다. 가느다란 팔다리에 비율이 맞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손발은 남편이 말한 대로 영락없는 우리 집안의 표식 같았다. 처음 아기를 볼 때는 어쩔 수 없이 오열하고 말았지만, 설명이 친절한 의사 선생님과 다정하게 아기를 돌봐주는 간호사 선생님들 덕분에 차분히 아기를 만날 수 있었다. 나흘 만에 퇴원한 후에는 면회시간 오후 1시에 맞추어서 유축한 모유와 기저귀 같은 것을 챙겨서 병원을 오갔다. 다들 마음고생이 더 크다고 안타까워했지만, 아기를 돌보지 않고 규칙적으로 매일 움직여서인지 제왕절개 수술 회복 속도가 빨랐다. 10미리도 안 되는 젖을 짜내느라 아프고 괴로웠지만, 인큐베이터에 누워있는 아기를 떠올리면 몇 방울 안 나오더라도 초유까지는 먹여야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다.
황달 이후 정밀 검진 결과가 좋았고 분유도 제 몸 크기에 비해 잘 먹어서 어느새 아기는 퇴원을 앞두고 있었다. 길게는 한 달 이상 예상했던 아기의 병원 생활은 2주쯤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니큐에서 나와 병실 아기침대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분유 먹이는 연습을 한 날, 비닐로 된 위생복을 입은 나에게 안긴 작디작은 아기가 미끄러질 것 같아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내가 쩔쩔매서 아기가 젖병을 자꾸 놓치니 결국 간호사 선생님이 분유를 마저 먹여주었다. 간호사 선생님 조언대로 산후 도우미 업체에 전화해서 이른둥이(서류에는 미숙아나 조산아라고 쓰여 있었는데, 검색해 보니 이른둥이라고 부른다고들 했다.) 경험이 많은 도우미 선생님을 부탁드렸다. 겉싸개 안에 파묻혀 잠든 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와 도우미 선생님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집에 온 여름
2킬로그램인 아기 여름은 초보 엄마, 아빠, 할머니 모두 안기 겁낼 정도로 정말 너무 가벼웠다. 분유를 먹이고 트림 시키고 눕히면 하루종일 잠만 자는 신생아여서 다들 말하는 "신생아 육아의 고생스러움"은 잘 몰랐다. 이른둥이라 배가 고파도 울지 않고 계속 잘 수 있으니 깨워서라도 먹여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떠올리며 잠든 아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것이 나의 주된 일과였다. 작은 체구에 단정하게 컬이 들어간 단발머리, 짙은 뿔테 안경을 낀 산후도우미 선생님은 프로페셔널한 분이었다. 항상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었고, 만들어주시는 밑반찬과 미역국도 내 입맛에 딱 맞았고, 빨래는 뭐든지 건조기에 돌리는 나보다 정성 들여 아기 수건을 햇빛에 말려주었다. 기저귀 가는 법, 트림 시키는 법, 배냇저고리와 속싸개 입히는 법, 씻기는 법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아기 돌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아무리 작은 옷을 사도 자루처럼 커서 헐렁대는 아기를 보다가 속상해진 엄마와 나는 인터넷에서 이른둥이 옷을 여러 벌 주문했다. 금세 못 입게 될 거라는 상품평도 있었지만, 빼빼 마른 아기의 몸에서 겉도는 배냇저고리가 보기 싫었다. 배냇저고리와 달리 티셔츠처럼 입는 바디슈트는 목에 힘이 하나도 없는 아기에게 입히기 힘들었지만, 선생님도 딱 맞는 옷을 입은 아기가 보기 좋다고 천천히 옷 입히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아기 여름은 하루가 다르게 볼이 빵빵해지고 뼈가 불거진 팔다리에도 살이 올랐다. 아기가 젖을 물 힘이 없어 직수 연습은 시도도 할 수 없었고, 유축기로 짜내는 젖의 양이 늘지 않았다. 끔찍하게 아픈 젖몸살에 마사지 선생님을 집에 모셔 부지런히 산후마사지를 받아보아도 모유의 양은 매번 우유병 바닥이었다.(붓기는 완전히 빠져서 마사지의 효과를 동네방네 이야기하긴 했지만) 어느 새벽에 수유를 마치고 유축하다가 눈물이 줄줄 흐르기에 모유수유를 포기했다. 한 달도 채 노력하지 않았는데 포기하기는 일렀지만, 선생님은 그런 나를 위로해 주었다.
"원래 산후도우미는 모유 수유를 가르쳐주고 도와주고 해야 하거든요. 그렇지만 산모님이 울면서까지 유축을 할 필요는 없어요. 양이 너무 적어서 분유 계속 더 먹여야 하는데 그냥 분유만 먹여도 돼요. 나도 우리 애들 다 분유 먹였어요."
아기를 볼 때마다 애달파하는 나의 엄마는 산후조리와 신생아 육아에 맞는 타입이 아니었다. 울거나 보채는 시간도 별로 없는 아기라 많이 안아주지 않아도 되었고, 여름철 밭일이 바쁘기도 해서 엄마는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남편이 회사에 가고 선생님과 아기와 지내는 시간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수유를 그만둔 기념으로 선생님이 만들어준 빨간 양념 찜닭은 얼마나 맛있었던지. 잠든 아기를 옆에 두고 나란히 소파에 앉아 빨래를 개면서 보던 연애의 참견은 또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선생님을 이모님이라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진짜 친한 이모처럼 대화가 잘 통하고 웃음 코드가 잘 맞았던 선생님이었다. 이른둥이인 여름을 종일 염려하며 인터넷과 육아서적을 뒤적이며 초조해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늘 기운 나는 말을 건네주었고, 수면 부족 상태로 이것저것 아무 말 대잔치를 이어가는 나의 장단에 맞추어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느 날은 충동구매로 산 옷을 우리 집으로 배송시켰다고 민망해하면서도 옷을 뜯어서 입어보는 모습이 귀여웠고, 20대인 딸과 사위가 싸운 이야기를 하며 속상해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집안일이 다 끝난 시간에는 맥심 모카골드 믹스커피를 같이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공부를 그만둔 사연과 몇 년 전 암 수술을 한 이야기, 산후 조리원에서 만난 아기와 산모들에 관한 경험담을 들려주던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가 가끔 떠오른다. 마지막 출근 날에는 순한 여름 덕분에 편히 지냈다고 점심을 사 주던 선생님과의 인연도 그 후 제법 길게 이어졌다. 가끔 전화 통화를 했고 겨울에는 선생님이 우리 집에 아기를 보러 오기도 했다. 아기는 당연히 선생님을 낯설어했지만, 낮잠 시간 동안 모처럼 선생님과 믹스 커피를 마시며 소곤소곤 수다를 떨었다. 여름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 우리 동네에서 일하게 된 선생님과 카페에서 두어 번 만나 샌드위치와 커피를 나누어 먹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선생님과 나의 시절 인연도 지나갔다. 때때로 메시지로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누다가 어느새 연락이 끊어졌다. 오래 의지하기에는 짧은 인연이었지만 출산 직후 무너지는 정신을 꼭 붙들게 도와준 선생님을 향한 고마움과 그리움은 아직도 남아있다. 동네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고 돌아왔더니 잠든 여름을 안고 소파에서 잠든 선생님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