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학원 원장은 마음대로 점심을 배달시켜 주었는데 메뉴는 볶음밥, 초밥, 짬뽕, 해장국 등으로 나름 다양했다. 물론 밥이 마음에 안 드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 학원에서 밥을 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감지덕지 잘 먹었다. 강사들 수업 시간표가 제각각이라 보통 혼자 밥을 먹었는데, 원장님 딸 은아와 겸상하는 날은 썩 편하지 않았다. 유치원생 은아가 하는 이런저런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 줄 여유도 시간도 없었지만 “나는 짬뽕에 있는 홍합 좋아하는데~ 나 주면 안 돼요?” 이런 말을 자주 해서 거절하기도 피곤하고 홍합 껍데기 까주기는 더욱 귀찮았다. “선생님은 밥 안 남기죠? 옆 반 선생님은 엄마가 사주는 밥인데 다 남기고 안 먹어요.” 같은 말을 들으니 끼니때마다 신경쓰여 밥을 남길 수가 없었다.(나중에 옆 선생님에게 밥 남기다 몇 차례 은아에게 잔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한 번은 화장실에서 큰 볼일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계속 딱딱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마주치면 민망하니 한참 기다리다 나갔는데 은아는 화장실 입구에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선생님, 응가했어요? 엄마가 그러던데 여기 수압이 약해서 응가하면 안 된대요." 얘 왜 이래? 심심한가? 이번에 대충 넘어가면 매번 나를 따라 화장실에 올 것 같았다. 학원에서 너무 오래 있어서 그런가? 좀 짜증 나는데? 똥 눌 때 애 눈치라도 봐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까지 들어서 “누가 화장실에 있을 때는 밖에서 지켜보면 불편하니까 그러지 마라.” 점잖게 일러주고 교실로 들어왔다. 딱딱 소리가 나는 메리제인 구두를 신은 은아가 화장실 문이 열릴 때까지 잠자코 서서 기다렸다는 사실이 못내 꺼림칙했다.
시간제 강사로 일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제일 오래 일했던 역사 선생님에게 이런 조언을 들었다. "원장님이 거짓말을 많이 하니까 조심해야 한다. 학부모가 하는 말이라고 전해주는 말은 대부분 원장 생각인데 누구 엄마가 그러더라고 거짓으로 지어서 말한다." 이런 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의심스러운 상황이 여럿 떠올랐다. “백화점 앞에서 은주 엄마를 만났는데 수업이 너무 느슨하다고 그러더라. 철수는 학원을 옮기고 계속 1등급이라고 그러더라. 엄마들이 샘한테는 말 못 해도 원장한테는 다 이야기하거든.” 나는 별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더랬다. 나랑 잘 지내던 어머니들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원래 학부모님들은 그만둘 때 원장님한테 불만을 말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원장의 말에 거짓이 섞여 있다 해도 학생이 학원을 그만두면 본래 강사에게 잔소리하는 게 원장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나긋나긋한 서울말, 깡마른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입은 그 원장이 내 눈에는 대단히 성공한 사람으로 보였다. 20대인 큰아들은 보스턴에서 유학 중이고 7살인 늦둥이 딸은 원장님과 오랜 시간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만큼 똘똘하다고 했다. 나는 평일에는 다른 학원에서 일하고, 논술학원에는 주말에만 출근했기 때문에 다른 선생님들과는 인사만 주고받는 정도였고, 학생들이 착하고 재미있어서 일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나는 성실한 강사였고 늘 바쁜 원장을 동경했는데, 내 시선을 느꼈기 때문인지 원장도 나에게 늘 상냥했다. 평소 원장은 나에게 유난히 칭찬을 자주 하고 자기 이야기도 자주 하는 편이었다.
어느 날 공강 시간에 교실 정리를 하고 있는데 원장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눈에 눈물까지 맺혀 내 강의실에 들어왔다. “정샘, 내가 정말 속상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가자, 원장이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초등학생이 된 은아가 엄마에게 말도 없이 반장 선거에 나가서 떨어졌는데 엄마에게는 반장 선거에 나간 적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단다. 은아가 친구들에게 가 본 적도 없는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는 거짓말도 했다고 들었다. 오늘 학부모 모임에 갔다가 부끄러워 죽을 뻔했다. 애가 왜 이렇게 거짓말을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고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는 원장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원래 어릴 때는 자기 상상대로 이야기하거나 친구들한테 기죽기 싫어서 지어내서 말하기도 하잖아요. 큰일 아닐 거예요.”
원장이 진정하지 못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 상담을 이어가자, 나는 어린이 상담센터에라도 한 번 가 보시라고, 은아 아빠(딸에게 다정하고 보통은 과묵한 아저씨로, 학원에 자주 보였다)는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시느냐 물었다. 원장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애가 엄마 하는 짓 고대로 따라 하는 거지. 내가 은아 데리고 집 나가 살아야겠다.”
안타까운 마음에 어릴 적에 내가 했던 거짓말들까지 떠올려 가며 원장을 한참 위로해 주었다. 그 사건 이후로는 어쩐지 원장이 더욱 짠하게 느껴져서 마음을 더 쓴 것도 같다.
시간이 흘러 역사 선생님과 새로 온 논술 선생님까지 친해져서 원장 몰래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원장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린 것이 결국은 퇴사의 계기가 되었다.
평일에 일하던 학원 원장이 임신 막달에 갑자기 고혈압과 임신 중독 증세로 제왕절개 출산한 이야기를 했더니 원장이 호호 웃으며 “나는 40대에 은아를 낳았는데 막달까지 독하게 운동 열심히 해서 자연분만했잖아.”하더라고 말했더니 듣고 있던 역사 선생님이 놀라면서 대답했다.
“내가 은아 공부 봐주니까 원장님이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우리 은아가 칠삭둥이라서 좀 느린 것 같다고 늘 걱정하거든.”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거나 둘 다 거짓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저 나에게 자기가 대단해 보이고 싶어서 출산 경험을 거짓말한 것 같긴 하지만…. 불필요하고 세밀한 거짓말에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칠삭둥이도 아마 아닌 걸까?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술잔을 기울였다.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원장의 거짓말은 쌓여갔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남을 모함하는 것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수다쟁이 은아가 역사 선생님에게 한 말에 따르면 보스턴에 유학 중이라던 오빠는 고종사촌인지 친척 오빠였는데 왜 친아들이라고 말했을까. 원장실에는 은아 사진뿐이었는데, 늦둥이 딸 하나뿐인 것도 흠이라고 여겨서 굳이 거짓말을 지어낸 걸까? 그 후로도 수상한 소식은 끊이지 않았다. 출근 이틀 만에 그만둔 중등부 선생님은 남자관계가 복잡한 것 같다고 말하고, 결혼하기 전에 그만둔 선생님은 예비 시모가 잔소리가 심해서 결혼이 하기 싫어졌다고 원장님께 연락이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원장님이 그런 걸 알 리가 없는데 말이다. “오늘 민수가 안 오네요?”라고 말하니 원장은 “아까 1층에서 봤는데?”라고 했다. 그날 민수는 결국 오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은아가 왜 거짓말을 하는지, 남편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멋있게만 보였던 원장님이 점점 나에게 불쾌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퇴사의 뜻을 밝힌 후부터 원장은 내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을 정도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마지막 출근날은 원장실에서 은아가 수학 계산 실수로 어마어마하게 원장에게 욕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인사 대신 메모를 붙인 쿠키 상자를 원장실 앞에 두고 떠났다. 후련했다.
몇 달 후 역사 선생님이 나에게 원장이 한 말이라며 전한 소식들.
“정샘이 그때 전임으로 간 학원이 너무 힘든지 다시 우리 학원에 오고 싶다고 전화했더라고.”
“정샘 수업 듣던 고1 나영이가 그러던데, 정샘이 남자 친구랑 헤어져서인지 수업을 제대로 안 했다 그러더라고.”
고1 나영이는 내가 학원을 떠나자마자 나에게 전화해서 내가 일하는 학원으로 옮겨온 후였다.
그 학원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고, 한참 이어지던 역사 선생님과의 인연도 어느새 끊어졌다. 이런 사람은 좀처럼 잊기가 힘들다. 별로였던 여러 원장 중에서도 악질인 사람이었다. 내가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잘 속는다는 것도 그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런 사람은 정신과에 가 봐야 하겠지만 절대 가지 않겠지. 그 사람과 은아의 인생 괜찮을까. 이런 오만가지 생각들로 보낸 시간은 모두 안녕.
-덧
‘보라 마녀’라는 별명은 내 수업에 결석한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 원장의 보강을 듣고 와서 지어준 별명이었다. “와, 진짜, 샘! 보라색 들어간 안경 낀 샘 있잖아요! 진짜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