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에는 내가 다니는 거리 어디에나 변태가 있었다. 노출증이라 해야 할 지, 정신병리학적으로 어떤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 지는 모르겠으나 흔히 '바바리맨'으로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바바리코트를 입고 짠! 하며 나타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이름대로 정석적인 바바리 변태도 있었을(있을) 터. 나날이 악독하고 저질스러운 성범죄 뉴스를 접하는 요즘 돌이켜보면 그들은 악인보다는 광인이나 병인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처음 낯선 변태를 만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일요일 낮에 골목에서 혼자 줄넘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체육 실기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무난하게 잘 되는 엑스 뛰기와 절대 안 되는 이단 뛰기를 번갈아 연습하고 있던 거였다. 꼬마야, 하는 소리가 들려 줄넘기를 멈추니 바로 옆에 얼굴이 시뻘겋고 삐죽삐죽한 머리카락이 지저분한 아저씨가 서 있었다. 몹시 초조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상가도 없이 주택만 늘어선 골목이라 공중화장실은 없었다.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자, 아저씨는 우리집 문을 가리키며 여기는 화장실이 아니냐고 물었다. 밖에서 보면 단칸방으로 올라가는 철제 문이 화장실 입구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 우리집에 들어가서 오줌이라도 싸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아니라고, 거기는 우리집이라고 말했다. 아저씨가 다른 곳으로 가기를 기다리는데 그는 바지춤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더니 바지를 쑥 내리는 거였다. 갑작스레 성기를 꺼내 보여주며 "이것 봐라, 오줌이 꽉 차서 터질 것 같다." 하는 게 아닌가? 자기 얼굴보다 더 시뻘겋고 징그러운 그것을 손으로 잡고 흔들며 나에게 만져보라 하는 것이었다. 미친! 나는 문을 세차게 열고 할머니와 고모를 부르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 미친놈이 우리집을 두드릴까봐 한참 떨었다. 다시 줄넘기를 들고 나갈 수도 없었다. 할머니와 막내 고모에게 방금 겪은 일에 대해 흥분하며 말했는데, 반응은 떨떠름했다. 왜 수상하고 낯선 어른에게 대답했느냐고 조금 잔소리도 들었다. 역시 어른들은 아이가 겪은 충격적인 사건에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미 시골에서 앞집 쓰레기 오빠에게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당했고 8살인 내가 나서서(그 오빠가 한 짓은 설명하지 못했고, 단지 괴롭힌다고만 말했다. 마침 우리집에 와있던 그 오빠의 아버지가 굉장히 폭력적인 어른이라 오빠가 죽도록 처맞는 엔딩으로 대충 수습되었다.) 거기서 벗어났지만, 그 일의 상세한 상황을 아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변태적인 행태들은 법에 명시된 정도의 폭행이 아니라면 아무도 모르는 분위기로 덮고 넘어가는 것이 내가 속한 세상의 규칙이었다.
여자 친구들끼리도 그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귀신 이야기보다 무섭고 부모님의 비밀보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것과 상관없는 죄의식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과 불쾌감을 키우는 이야기는 아이들의 화제가 되기 힘들었다. 아이들이 자라서 여중생쯤 되었을 때 만나는 바바리맨들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일대일로 마주치지 않았기에 두렵지 않았다. 여중이나 여고 근처에서 나타나는 바바리맨은 여자아이들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훌렁 바지를 내리는 식의 행동을 자주 했는데, 꺄악하는 아이들의 비명을 들으면 만족한 듯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아주 가끔은 으슥한 담벼락 근처에서 자위하는 변태들 이야기가 아이들 사이에 괴담으로 돌았는데, 다행히(?) 나는 그런 변태를 마주치지는 않았다.
내가 다닌 여고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굴다리를 지나 10분을 더 걸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굴다리 차도와 나란히 뻗은 인도의 끝에는 오른쪽으로 꺾어진 계단이 있었다. 아침 7시까지 등교하는 여고생들이 바쁜 걸음으로 굴다리 입구에 다다랐다. ‘뭐야?’ 하는 소리에 앞쪽을 보니 꺾인 계단으로 야구모자를 쓰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경쾌한 걸음으로 폴짝 뛰어오는 거였다. 바지를 슬쩍 내려서 달랑거리는 성기를 한껏 보여주면서. 당황한 두어 명 아이들이 꺅 소리를 질렀지만, 다년간의 경험으로 준비가 되었달까, 화가 많은 나와 친구들은 소리를 지를 때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치밀어오르는 공포를 누르며 한껏 경멸을 담아 쌍욕을 시전할 순간이었다. "뭐고? 미친놈이? 또라이아이가? 돌았나, 저 변태새끼가!" 누군가의 선창에 용기를 얻은 한 무리 여학생들은 저마다 쌍욕을 내뱉었다. ‘씨발놈, 개씨발새끼, 변태새끼’처럼 짧은 욕부터 ‘젊은 놈의 새끼가 새벽부터 지랄한다’는 구수한 욕까지 얻어먹은 그는 당황해서 큰길쪽으로 뛰어갔다. 바지춤을 올리지도 못하고 뛰느라 트레이닝바지는 무릎아래로 내려갔다. 하얀 궁둥이를 내놓고 뛰어가는 그의 뒤통수가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욕을 퍼부으며 깔깔 웃었다.
굴다리의 트레이닝 변태같은 놈은 흔하디흔해서 여자아이들의 대화에서 화제가 될 수 있었다. 함께 욕하고 화내고 웃을 수도 있는 부류의 ‘변태 퇴치썰’은 일종의 무용담으로 술자리에서 음담패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무용담이 되는 변태썰에는 높은 확률로 여자 아이들이 떼로 등장한다. 아무리 허접한 변태라도 일대일로 맞서 대응할 수 있는 장군같은 여자는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비겁함이 특징인 변태들이 언제나 약자들을 골라서 까불기도 하지만, 일대일로 만나는 변태들은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한 번도 변태를 만난 적이 없다는 운 좋은 여자 친구들도 있긴 있지만, 내가 어린 시절 만난 변태 이야기를 하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거나 한참 후에 비슷하거나 더 질이 나빴던 변태 이야기를 고백하듯 꺼내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90년대에는 그런 변태들의 행태가 불법 촬영이나 디지털 성범죄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길 가다 똥 밟은 일처럼 애써 담대하게 넘기는 일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다 커서 만난 이 하찮은 부류의 인간들 가운데 지금 떠올려도 소름 끼치는 영감이 하나 있다. 수능을 마친 초겨울에 심심하고 지루했던 어느날 오후, 늘 다니는 아양교 강둑에 돌아다닐 때였다. 한참 걷다가 다리가 아플 때쯤 한적한 벤치에 앉아 책 대여점에서 빌려온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쌀쌀한 강바람에서 나름의 운치를 느끼며 책장을 넘기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해가 좋은 날이면 늘 할아버지들이 모여 앉아 장기를 두는 등나무 벤치 쪽에서 온 할아버지 같았다. 체크무늬 빵모자를 쓰고 점퍼를 입은 인상 좋은 70대였다. 웃는 얼굴로 나를 보며 ‘추운데 앉아서 무얼 하나’ 하기에 예의 바르게 ‘만화책 읽어요.’ 했더니 또 ‘몇 살인고?’ 했다. 고3이라고 답했더니 또 빙글빙글 웃으며(웃는 얼굴이 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추우니까 따뜻한 데로 가자고 말했다. 가방을 챙기며 괜찮다고 대답했더니 배가 고프지 않냐며, 빵을 사주겠다고 하며 슬쩍 내 어깨에 손을 댔다. 잘은 몰라도 위험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야한다고 말하며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노인은 밥을 사주겠다, 추운데 어쩌고저쩌고 헛소리를 하면서 몇 발짝 나를 따라오다가 말았다.
다행히 다리로 이어지는 계단이 지척이라 곧 큰길로 올라왔다. 한참 후에 곰곰이 상황을 복기할 때쯤에야 선명히 깨달았다. 노인이 나를 갈 곳 없는 아이로 보았다는 것과 아마도 아주 적은 돈으로 성매매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었었다는 것. 온몸에 소름이 돋는 불쾌감과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노인 공경’이라는 말 따위가 떠올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짧은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이상한 할아버지 만난 기억’으로 남아있던 찝찝한 경험은 세월이 지나면서 ‘더러운 영감을 피한 천만다행한 사건’으로 재정의되었다. 어린 시절 만난 변태들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거침 없이 꺼냈지만, 남자들에게 노인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들은 내가 느낀 미묘하고 더럽고 위협적인 노인의 눈빛과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어쩌면 ‘네가 오해한 게 아닐까? 그냥 마음 좋은 할아버지일 수도 있지 않아?’라고 대가리 빻은 소리를 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