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햇볕은 쨍쨍

매일 바쁘게 꽉꽉

by 원효서
접시꽃


1. 꿈이나 생시나


바닥까지 내려오는 회보랏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마녀가 커다란 의자에서 긴 담뱃대를 물고 나를 물끄러미 보는 꿈, 쿵쿵하는 소리에 맞춰 등을 대고 누운 바닥이 깊은 곳으로 꺼져가는 꿈, 죽은 내 몸을 빤히 보다가 영혼이 되어 시골 마을을 찾아가는 꿈... 10대부터 20대까지는 비현실적이고 인상적인 꿈을 많이 꾸었다. 한참 동안 쫓기는 꿈이나 내가 죽는 꿈도 꾸었지만 서른 중반쯤부터 내 꿈은 환상성을 잃었다.


꿈에서도 생시에 만나던 친구를 만나서 놀고, 카톡을 주고받아서 깨어나면 진짜 약속이 있었나 확인하곤 했다. 화가 난 상대(주로 남편)에게 화풀이하는 꿈, 엄마나 아빠에게 진심을 터놓는 꿈도 현실 같았다. 서운할 정도로 실제 같은 꿈에 가끔은 강동원이나 구교환이 나올 때도 있었는데, 꿈에서도 그들은 연예인이고 나는 그들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윗집이나 아랫집 친구) 친하게 지내는 정도라 시시했다.


내가 임신했을 때 태몽을 꾸었다는 사람도 없었다. 임신 중후반에 연분홍과 연보라 꽃나무가 흩날리는 길에 혼자 서 있는 꿈을 꾸었다. 꿈인데도 생생하게 솜사탕 냄새가 났고, 유화로 그린 듯 아름다운 풍경이라 그걸 태몽으로 정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에는 시아버지가 꿈에 나왔는데, 아주 자그마하고 발그스름한 아기를 품에 안은 내가 "정말 작죠? 근데 너무 예쁘죠?" 하고 말하는 순간이 깨어나서도 계속 떠올랐다. 당연히 개꿈이었겠지만 아이가 정말 작게 태어나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요즘 꾸는 꿈들도 생시와 다를 바가 없다. 걱정거리가 있으면 그대로 꿈에 나온다. 가족 모임 이후에는 남동생과 엄마와 내가 함께 여행 계획을 세우는 꿈을 꾸었고, 불효자랑 책이 나온 후에는 인스타에서 얼굴을 본 작가님들을 꿈에서 만났다. 매일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꿈이지만 어릴 적처럼 가슴 졸이고 서글픈 꿈을 꾸지 않아 만족한다. 아무튼 잠은 잘 자고 볼 일이니까.


능소화



2. 나의 인어공주


오일장에 자주 따라갔다. 엄마와 중국집 우동을 먹기도 하고, 치즈맛(짜고 느끼해서 실망)을 보기도 했다. 엄마 친구가 하는 신발 가게 마루에 앉아 어른들 이야기를 주워들으며 달콤한 주전부리를 얻어먹으며 귀여움을 받았다. 가끔씩은 시외버스를 한 시간 타고 영천장에 가기도 했다. 감기나 배탈이 아닌 병이 나면 영천에 있는 큰 병원에 가야 했다. 그런 날에는 가게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장골목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순대를 같이 먹었다. 나는 퍽퍽하고 부드러운 간만 먹었는데, 지금은 아예 안 먹으면서도 그때 맛있게 먹었던 납작한 세모모양 조각은 특별히 맛나게 느껴지는 게 왠지 재미있다.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는 시골에는 없는 큰 서점이 있었다. 그 서점에서 엄마는 교원세계명작동화(검색하니 금방 나왔다) 시리즈의 인어공주를 사주었다. 정사각형 책과 카세트테이프가 세트로 들어있었다. 애니메이션 일러스트 스타일로 그려진 삽화가 어찌나 예쁘고 선명하던지, 샛노란 금발에 분홍 비늘 꼬리를 한 인어공주를 단박에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몇 살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글을 완전히 읽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나에게 테이프를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 글씨를 잘 알게 될 거라고 했다.


그날부터 할아버지가 경로당에 가 있는 동안 상방에 있는 커다란 카세트에 테이프를 넣고 인어공주 이야기를 들었다. 끼룩끼룩하는 물새 소리, 철썩철썩 파도 소리는 한 번도 간 적 없는 바다를 꿈꾸게 했다. 무도회가 펼쳐지는 유람선, 안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이웃나라 공주, 으스스한 목소리의 마녀와 울먹이는 인어공주의 언니들, 그리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인어공주의 눈물.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듣고 또 들었다. 난생처음 '이야기를 듣고 울고 싶어지는 마음'을 느꼈다. 어금니가 간질간질해서 입술을 삐죽이고 싶은 기분,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무지개색 세상을 펼쳐두고 싶은 마음.


인어공주로 한글을 더 잘 익히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작은 목소리로 스토리를 따라 읊으며 가슴 아픈 짝사랑 이야기와 극적인 사건 전개에 끌리게 된 건 맞는 것 같다. 딸아이에게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인어공주 따위의 이야기는 무언가 잘못된 거라고 알려주고 있지만, 내가 들었던 절절한 비극의 러브스토리는 언제까지나 나를 이루는 한 조각으로 남아있을 듯하다.


오랜만에 그림티 모임



모처럼 자화상

한여름 더위가 시작되었다. 장마가 길 거라더니, 연일 뙤약볕. 가만히 앉아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게 제일 좋은 계절이지만, 아이와 함께 어찌나 할 일이 많은 지... 어제는 계곡에 다녀왔고 오늘은 동네 물놀이터에 가야 한다. 계곡물은 차가워서 덜덜 떨었는데, 오늘은 꼼짝없이 햇빛아래 고생 예정. 즐거워하는 어린이를 보며 뿌듯해하는 일이 보호자의 도리, 엄마의 삶이겠지만. 미디어 보여주는 시간을 줄이려고 시도 때도 없이 나가야 하는 내 신세가 이게 뭐람.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몸이 일으켜지질 않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