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반은 잠
7월 9일
아침이 세 알, 필요시 세 알
오지은의 책 "우울증 가이드"를 다 읽었다. "예전에 나도 우울증이었지."라고 한 발짝 물러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었으나, 딱 잘라 과거형일 수는 없었다. 우울증이든 강박에서 비롯된 불안과 화병이든, 크기가 작아지긴 했지만 나에게 분명히 남아 있었다. 여전히 내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피할 수 없는 자각. 유방 초음파 촬영과 더불어 매주 미루던 정신의학과 진료, 오늘 드디어 받았다. 나에게는 세 번째 정신과이고 친구가 소개해준 병원이기도 해서 괜찮을 것 같았는데, 커피를 사서 걸어가는데 가슴이 엄청 두근거렸다. 건강검진보다는 더 떨렸고 스케일링받으러 갈 때보다는 덜 떨렸다.
문진표를 쓰고 기다리면서 "욕구들"을 펼쳤다. 정신과 대기실에 딱 어울리는 책이라고 생각하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온 세상이 이런데 정신병이 안 걸리고 배기냐?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우울증 가이드"에 나온 경우처럼 "이 정도는 쉬면 나아지니까 걱정 마세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도 품어보았다. 과연 나는 걱정 말아도 되는 상태는 아니어서, 선생님이 내 대답을 들을 때마다 빨라지는 타이핑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처럼 보이는 키보드가 좋아 보여서 물어보려다가, 역시 adhd인가 싶어서 자중했다.
일주일치 아침약을 받았다. 가득 찬 물 잔을 들고 걸어 다니면 누가 부딪힐 것 같기만 해도 화가 날 수밖에 없으니, 물 잔에 든 물을 반잔으로 줄여주는 약이라고 했다. 일단은 감정을 좀 잡도록 도와주겠다고. 용량과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진득하니 약을 먹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귀찮아하지 않고 꾸준히 다니겠다고, 아이에게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는 것보다 약을 쭉 먹는 편이 낫다고 계속 자신을 가르쳤다. 의지로 될 일이 세상에 몇이나 있던가.
그 동네에 머물고 있던 병원 친구에게 카페모카를 얻어먹으며, 온 세상에 신경안정제를 뿌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 웃었다. 지치고 피곤했지만, 병원에 다녀온 것만으로 훌륭한 오전이었다. 커피를 벌컥벌컥 몇 잔이나 마셨는데도 졸리는 건 약 덕분인지, 더위에 걸어서인지 모르겠다.
생리 기간이 겹친 탓에 약 기운인지 아닌지 애매하지만, 이틀째 무지하게 졸린다. 평소대로 커피를 두 잔 이상 마시고도 9시쯤 아이를 재울 때 잠들어버린다. 해도 지지 않았는데 아까부터 계속 하품을 하면서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 건조기에 세 번째 빨래가 다 말라서 들어있는데, 이전에 나온 수건과 옷가지들을 개지 못하고 있다. 내일 캠핑 가려면 옷을 챙겨야 하는데... 1시간 후의 내가 해주려나, 2시간 후의 내가 해주려나, 그것도 아니면 내일 아침 허둥지둥하는 나에게 맡겨야 할까?
감정조절에 도움이 된다는 약은 약효가 아주 좋다. 수요일부터 한 번도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못된 말을 하지 않았다. 하기 싫은 설거지나 청소를 하면서 에이씨! 도 하지 않았고, 혼자만 들리게 쌍욕을 내뱉지도 않았다. 평소보다 화낼 일이 없었던가 자문해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늘 그렇듯 집안일은 내가 다 하고 있고, 어제오늘 집은 평소보다 훨씬 지저분하니까 지금쯤 구시렁대고 있어야 하는데... 역시 약 덕분인가 싶다.
졸리고 멍한 느낌이 단점이라면, 술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게 장점이다. 팍! 하고 화 기운이 올라오면 자동으로 술을 떠올렸는데, 짜증이 치솟지 않으니 알코올 생각이 나지 않는다. 신경질이나 꼴 보기 싫은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아, 이거 좀 보기 싫네." 하고 넘어갈 여유가 생겼다. 기운이 없어진 느낌이지만, 예민하지 않으니 편안하긴 하다. 그나저나 정리, 준비, 청소는 언제 다 하지?
끼니를 건너뛰는 일
아이를 기르면서 아침형 인간이 되었고, 아침형 인간이 되고는 아침밥을 챙겨 먹는 삶을 살게 되었다. 아침에 깨지 않아 아침밥을 모르던 십 수년의 생활을 정리하고, 늦어도 9시 전에 뭐라도 챙겨 먹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메뉴는 주로 빵과 커피, 샐러드와 빵, 어쩌다 과일과 빵, 때로는 미역국이나 된장국에 말아먹는 밥이다. 등교하는 아이와 함께 먹기도 하고, 아이를 보내고 혼자 먹기도 한다. 남편이 야간근무일 때에는 세 식구가 함께 먹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눈뜨자마자 밥상 차리는 일에 역정이 난다. 아침밥은 혼자 먹는 편이 좋다.
빵을 먹으며 책과 폰을 보다가 플라잉요가를 하러 나간다. 운동을 하고 다른 일정이 없을 때에는 데일리 친구와 커피 타임, 그림을 그리거나 수다를 떨다 국수나 김밥 같은 걸 점심으로 먹고 헤어진다. 저녁에 수업이 없을 때는 6시 전후로 저녁을 챙겨 먹는다. 삼시세끼, 제대로든 아니든 끼니를 놓치지 않는 편이다. 배고플 때 가장 쉽게 화가 나기 때문에 허기지지 않도록 나를 관리하는 일이야말로 기본적인 나의 업무라 할 수 있다.
오늘은 드물게 저녁을 건너뛰었다. 곧 아이를 재우고 뭐라도 챙겨 먹을지도 모르겠지만, 배가 고파도 너무 졸린 지금 기분으로는 그냥 잠들어버릴 것 같기도 하다. 세탁기에 빨래가 돌아가고 있는데, 이따가 깨서 널어야 하는데... 영화를 보고 싶은데...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간단히 먹을 요거트도 다 떨어졌으니 잠들기 전에 주문이라도 해야 하는데... 무엇 하나 하지 않고 잠들 것 같은 밤이다.
22시간 후에 빨래를 개다가
결국 어젯밤에는 잠들었다. 약 부작용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한숨이 푹푹 나오는 날이다. 시원해서 좋은데 흐리고 비가 와서 우울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인지, 해야 하는 일 앞에서 아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갑갑한 것인지, 아무튼 일이란 일은 모조리 하기가 싫은 날이다. 억지로 설거지와 빨래를 하긴 했는데, 입맛이 없다. 상큼하고 칼칼한 무언가를 딱 두 입만 먹고 싶은 기분인데, 그게 대체 무엇인가. 냉면 국물? 오이냉국? 아무튼 나에게 음식을 대령할 사람은 없다.
빨래, 어제부터 개려고 했던 빨래를 개다가 이걸 쓰고 있다. 꼽표보다 공표가 좋으니까, 빨래보다 메모장이 좋으니까, 그런 이유로 그림책 세 권과 쿠션 두 개, 쿠로미 가방과 어린이 빨래를 옆으로 슥슥 밀고 일기를 쓴다. 빨래가 개기 싫다고, 입맛이 없다고, 커트를 하고 펌을 새로 했는데도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숨 같은 글자를 찍어대고 있다.
팬티 넉 장, 티셔츠 두 장을 개고 다시 메모장으로 돌아왔다. 다리에 닿는 선풍기 바람이 시원하다. 이렇게 소파에 기대 쉬다가 스르르 잠들고 싶은데, 엄마엄마엄마 부르는 소리가 끝이 없다.
7월 17일 목요일
차갑기는 하겠지
지난 주말에 캠핑 가느라 얼음을 탈탈 털었다. 짐정리를 마치고 일요일 밤에 비어있는 실리콘 얼음틀 세 개에 물을 채웠다. 정수기 250미리로 한 통씩 받으면 딱 맞는 얼음틀, 흘러넘치지 않게 잘 움직여가며 칸을 채우면 은근히 성취감이 있는 일이다.
월요일에 아이가 먹을 뜨거운 누룽지에 얼음이 필요해 냉동실을 열었더니 얼음통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아침이 바빠서 곧 잊어버렸다. 마침 날씨도 시원해져서 얼음을 찾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밑반찬을 꺼내려고 무심결에 냉장실을 열었더니, 얼음통 세 개가 레고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 정도 건망증이야 별 거 아니지, 별 일 아니야. 냉동실로 얼음통을 옮기고 웃고 넘겼지만 요즘 확실히 정신머리가 빠져 지낸다는 자각이 분명해졌다. 볼 영화를 계획해도 아이를 재우며 먼저 잠들기 일쑤, 매일 10시간씩 자면서 허탈해하는 요즘이다. 오늘은 절대 잠들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