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정신머리와
7월 21일 월요일 ㅡ치마
때때로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하면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단어가 '치마'이다. 왜인지는 모른다. 아주 옛날부터 자주 떠올라 무턱대고 골라본 오늘의 글감, 치마.
여중, 여고를 다니며 6년 간 입은 교복 치마, 시선을 의식하며 입는 미니스커트와 플레어스커트, 씻고 나와서 샤워가운 대신 입던 고무줄 치마, 길고 팔랑거리는 원피스들. 치마를 많이도 입었다.
여전히 치마를 자주 입지만, 20대 때 같은 느낌은 아니다. 대부분 원피스는 헐렁하거나 길이가 길고, 허벅다리가 싹 드러나는 미니스커트는 옷장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20대 때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치마는 항상 나에게 짧았다. 빼빼 마른 모델들이 입는 40센티미터 남짓한 길이의 청치마, 바람이 불면 속바지가 드러나버리는 깡똥한 시폰 원피스, 겨울에는 몸에 딱 붙는 니트 재질 원피스를 입었다. 불편하지만 좋았다. 섹시해 보이는 몸매를 드러내는 일을 좋아했다.
옷을 고르는 기준에는 색과 디자인, 무엇보다 가격이 우선했지만 0순위는 '날씬해 보이는가?'였다. 날씬한 다리를 더 드러내고, 가슴이 둔해 보이지 않는 옷, 그러면서도 섹시하려고 작정하는 옷은 과하고 불편하니까 편하고 귀여운 느낌도 내고 싶었다. 온갖 종류의 옷에 도전하고 실패하며 나이를 먹었다. 사진도 거의 없는 20대 시절이지만, 그때 입던 몸을 옥죄는 옷들은 이제 멋 대신 소화불량을 일으킬 뿐이리라. 미니스커트에 싸구려코트를 하나 걸치고 역시 싸구려 부츠를 신고 거리를 활보하던 밤이 떠오르는 아침이다.
'치마'라는 단어가 시도 때도 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건, 치마를 사고 입을 때마다 심사숙고하던 시간이 하도 길어서 그런 걸까? 멍하니 머리를 비우다가 떠오르는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치마'인 내가 옷에 바친 고민의 세월을 자꾸 곱씹게 된다.
7월 23일 수요일 ㅡ 공표와 꼽표
그 옛날 깔표라고 부르기도 한 꼽표, 꼽표는 엑스 표시이다. 듣기에 따라 '꽃표'로 예쁜 단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꼽표. 엑스 표시가 곱하기 기호라서 꼽표라고 부르게 된 것일까? 가위표라는 표현은 써 본 적이 없다. '뭐든지 기록하기' 방에서 밤 10시가 되면 멤버들 이름 옆에 공표와 꼽표가 그려져 올라온다. 처음에는 무심히 보고 넘어갔는데, 나 혼자 꼽표일 때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고, 신경이 쓰인다고 생각하자마자 공표에 집착하게 되었다. 내가 운영하는 북클럽 방에서도 잘하지 않는 클리어를 향한 열망.
한 줄을 같게 만들고 싶은 강박 성향의 발휘, 그것보다 우선해서 와닿는 무언가를 쓰지 못한 하루의 무게. 그림일기마저 손에서 놓은 지 열흘이 넘어가는데, 아무 기록도 남지 않는 하루는 이다지도 헛되다 싶을까.
2주 치 약을 받아왔다. 선생님의 예상대로 약을 먹은 지 3주 차가 되자 많이 편안해졌다. 오늘 진료에서 선생님은 '안정적이었던 나의 상태로 돌아간다.'라는 말을 했다. 그때의 감각으로 돌아간다는 기분으로, 밤마다 스스로를 다독여야 한다고.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함께 진지하게 고민했다. 안정적인, 이렇지 않았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인생이 어쩌고 하는 생각이 시작된 날부터 지금까지 '안정된 자아상' 따위는 가져본 적이 없는데 기준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 머리를 맞대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이것저것 보고 쓰고 그리고 움직이고, 밥도 잘해 먹는 기간에도 멀쩡하다고 잘 느끼지 못한다. 부지런을 떨고 많이 움직이는 현재의 내가 가벼운 조증 상태를 며칠 더 유지할 수 있을까, 풀썩 조증이 가라앉으면 그만큼 축 처질 날이 눈앞에 보이니까.
뾰족하게 깊었던 날들이 슬슬 지나간다. 내일 아침 공표를 보고 싶은 단순한 마음으로 일기를 쓴다. 폭염과 여름방학을 맞으며.
7월 24일 ㅡ 길어도 좋은 목요일
영어그림책 모임에 여름을 데려갔다. 두어 명 아이 친구를 예상하고 갔는데 어린이들이 오지 않아서 어쩌나 싶었는데, 어찌어찌 모임에 끼었다 빠졌다 하며 시간을 잘 보냈다. 심심하다고 했다가 책에 불쑥 끼어들었다가 정신 사납게 행동해도 세상 너그러운 이모들이 듬뿍 귀여워해주었기에, 여름은 나보다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콩나물밥집에서도 공깃밥을 주문했을 뿐인데 참기름과 맛간장, 김가루까지 넣은 서비스밥을 얻어먹었다. 덕분에 나도 콩나물밥을 완밥하고 간장김가루밥(두 그릇째 서비스를 받았는데 남기기 미안했다)까지 팍팍 퍼먹고 말았다. 저녁을 먹기 힘든 스케줄이어서 점심 과식은 용하게 옳았다.
카페에서 단 음료를 먹으며 소설 "가녀장의 시대"를 다 읽었다. 오늘따라 여름과 놀아주는 손님들이 많아서 훌훌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이슬아는 과연 이슬아! 이 시대의 위인. 씩씩하고 재미있어서 단박에 기운을 얻는 이야기였다. 마침 여름의 친구인 카페 조카가 놀러 와서 저녁까지 순조롭게 잘 놀았다. 오지은 작가님의 "우울증 가이드북" 북토크를 어떻게든 가고 싶어서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양해까지 구해놓았는데, 카페 사장님이 조카와 놀게 해 주겠다고 했다. 세상에나...! 염치 불고하고 룰루랄라 북토크를 들으러 갔다.
진짜 정말 아주 몹시 좋았던 북토크는 "걱걱이라고 하지 않잖아요."로 깔깔 포인트를 간직하기로 했다. 이러니 저러니 복잡하고 곤란하고 힘들고 골치 아플 때는, 정신과에 일단 한번 가보기로 해요. 내가 듣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을 몽땅 해준 작가님, 내일 티니핑 관람차 꼭 타보고 떠나시길.
7월 25일 금요일
안경을 쓰고 방을 닦아야 하는 날이 있다.
쭈그려 앉아,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한참 전부터 그런 날이 되었지만 꿋꿋이 청소를 미룬다.
식탁 주변만 가까스로 물티슈로 닦으며
어질러진 채로 몇 날 며칠을 지낸다.
오늘은, 내일은 꼭 치워야지 하면서
오늘도 애니메이션을 재생한다.
내일은 꼭 청소하리라.
7월 26일 토요일
웬만하면 지금쯤은 바닥청소를 하고 집을 한 번 싹 치웠을 법도 한데, 어지간히 뻗어버린 정신머리에 가까스로 설거지하고 식탁 주변만 치웠다. 15분이면 싹 정리될 정도인데도, 그냥 못 움직이겠다 싶을 때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덕분에 토지 2권을 다 읽었다. 그러면 됐지, 뭐. 오전 내내 누워 있다가 아이에게 소리를 꽥 지르며 물놀이터에 따라 나갔다. 1시간 좀 넘도록 캠핑의자에 앉아 졸다가 폰을 보다가 들어왔다.
5시에는 플리마켓에 중고책을 싸들고 나갔다. 균일가 3천 원, 잘 안 팔릴 거라는 건 당연했지만 즐거웠다. 무더위에도 깔깔 웃을 친구들이 있었고, 하늘이 아름다웠고, 각산마을 할머니들의 시 낭송과 멋진 정은아밴드의 음악도 들을 수 있었다. 더워도 이 정도까지는, 할 수 있는 저녁이었다.
내일은 파스타를 해 먹고 매니큐어를 새로 칠하고 나서야지. 떨리는 북토크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