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와 여름에도 플라잉
장마철 단상
"장마는 싫다고 말해왔지만, 오늘처럼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에는 기분이 좋다. "라고 어제 한 문장을 써두었다. 해가 나고 바람이 부는 오늘, 아무 약속도 잡지 않고 8시 반부터 2시 반까지 소파에 붙어 있었다. 왓챠에서 "이어즈 앤 이어즈" 마지막 회를 보며 눈물을 훔치고, 된장찌개에 밥을 비벼 먹으며 드라마 "밀회"를 보기 시작했다. 12시쯤에는 나가서 우체국 볼일을 보고 쿠폰을 다 모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했는데,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끊지 못하고 5회까지 쭉 봐버렸다. 남편과 롯데리아 햄버거를 배달시켜 먹고, 아이가 집에 들어오기 직전에야 티브이를 껐다.
창밖으로 보이는 비 갠 하늘이 아름답고 바람도 상쾌했다. 4시에는 아이를 따라 아랫마을 놀이터에 갔다가 6시에는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우리 동네 플리마켓에 갔다. 막상 밖에 나가니 여름 햇볕이 뜨거웠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한 오후였다. 오랜만에 만난 놀이터 친구들과 벤치에서 보리빵을 뜯어먹으며 근황을 나누고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으로 김치볶음밥을 해 먹었다.
밤에는 커뮤니티 줌 모임을 하고 빨래를 널었다. 지금은 11시 15분, 아이 옷이 널린 작은 빨랫대를 창문가에 두고 바람을 맞으며 일기를 쓰고 있다. 밀회를 이어 보고 자야겠다. 장마고 여름이고 날씨고 모르겠고, 머릿속에 슈베르트와 김희애만 한가득이다.
바쁜 목요일
퇴근하고 등교하는 식구들과 아침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한 달에 두 번 영어그림책 모임에 가는 목요일. 요즘 부쩍 운전이 귀찮아져서 시간 맞춰 버스를 타고 팟캐스트 영노자를 들으며 눈을 좀 쉬었다. 오지은 작가가 기운찬 목소리와 또렷한 말투로 우울증 가이드를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나의 우울증 사연을 듣던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렸다. "언니가요? 우울하다고?" "니가? 자기혐오?" 자신의 우울을 받아들이느냐, 부정하느냐 선택의 차이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우울을 농담거리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깔깔 웃으면서 쉴 새 없이 앞에 앉은 사람을 웃기려는 나의 처세는 우울과 무기력과 분노를 동력으로 굴러 나온다. 내가 이런 사람인 것을 싫어하지 않게 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건강한 정신 상태가 아닐까. 울증도 조증도 강박도 주의 산만한 애정과 분노도 거기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나.
루나샘이 읽어주는 영어그림책은 취향이든 아니든 다 재미있다. 구시렁대고 싶은 걸 참다가 결국 아름다운 스토리의 흐름을 깨고 마는데, 비슷한 친구가 양쪽에 앉아있어서 기가 죽지 않았다. 감성과 동심에 빠지는 책방지기가 방울뱀 소리를 내며 귀엽게 눈을 부릅떴지만, 끄떡하지 않고 "사랑에 빠진 개구리, 사실은 갱년기 아닌지...?" 계속 장난을 쳤다. 모범생인 척하면서 쭉 구시렁댔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모임 내내 친구들이 가져온 햇감자를 먹고 점심시간에는 한식 뷔페에 가서 또 배불리 밥을 먹었다. 부족한 시간에도 커피타임까지 따라갔다가 급히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경미의 열무김치, 혜진의 풍선 인형, 친절한 기사님이 준 멘토스까지 들고 들어와 한숨 돌리며 토지를 읽었다.
억지로 수학숙제를 하는 여름이 눈물이 그렁그렁하며 짜증 내는 걸 지켜보고, 시험대비 수업을 했다. 40분 휴식 시간에는 누워있고 싶은데 무어 이리 바쁜지 모르겠다. 청소기도 돌려야 하고, 건조기에 든 수건도 꺼내야 하는데... 오늘 밤에도 밀회를 보아야 하는데... 이래서야 깨어있을 수 있으려나.
현충일 이후 단톡방을 없애고 3주 정도 소식이 없던 엄마를 만났다. 손녀가 생일이라고 할머니를 초대했으니, 내가 중간에서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내키지 않는 만남이었지만, 아이의 생일이 우선이니까 잘 지내려고 했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거면 되었다. 앞으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시시콜콜한 감정 공유는 자제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