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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Sep 14. 2020

K에게

나는 내가 두려워
모두를 망가트릴까 봐


K는 어깨를 들썩이며 기어이 반짝이는 물방울을 또로롱 떨어트렸다. 카페 안을 채운 외국인들은 저마다의 세계에서 안온해 보였다. 다정한 연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사람도 보였다. 몇몇 둘러앉은 사람들은 소파에 기대 오후의 나른함을 즐기고 있다. 그 속에 K가 있어 더 위태로워 보였는지도 모른다. 의자를 당겨 K 옆으로 가져가 앉았다. 그녀의 흔들리는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가만가만 어깨를 도닥여 줬다.


란 기억 속에서 K는 찬란할 정도로 환했다. 보드라워 찢기고 망가지면 빛으로 덮어버렸다. 많이 말하지 않았지만 잘 웃었고, 천천히 걷는 걸 좋아했지만 춤을 추는 아이였다. 가끔 툭툭 튀어나온 재치는 언제나 나를 까무러치도록 웃게 했다. 그냥 좋았다. 마냥 좋았다. K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갈 친구였다. 사춘기와 함께 찾아왔다. K의 변화는. 어떤 주기로 그녀는 더는 반짝반짝하지 않은 순간을 살았다. 빛을 내지 않는 시간에 그녀는 드러난  생채기들을 고스란히 안고 한없이 고요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사람들은 밝은 것을 좋아했다. K 안에서는 일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치열했지만 거의 모든 사람은 그녀의 전쟁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혼자 감당했고, 그렇게 들키지 않고 그 시간을 지났다. 혼자 감당하기 버거울 때 가끔 나를 찾아 울었다. 그리고 나면 거짓말처럼 노란 시절 빛의 K가 돌아왔다. 더 활기차고 더 환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위태로울 정도로 달려갔다. 달리는 K 옆에서 나는 조마조마했지만, 걱정보다 그녀는 훨씬 잘 해냈다.


균형이 무너진 것은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후였다.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가족은 소중함의 무게가 되어 그녀를 눌렀다. 남편은 그녀를 품고 싶어 했지만, 서늘하고 뾰족한 그녀를 안지 못했다. 아이는 상관없이 늘 그녀를 필요로했다. 가족들 사이에서 보호하고 회복할 공간과 시간을 잃어버리자 그녀의 내리막은 끝도 없이 깊어졌다. 끔찍이도 사랑하는 가족이 그녀를 갉아 먹었고 너덜너덜한 그녀는 가족들에게 필요한 만큼을 내주지 못했다. 그러다 빛을 찾으면 K는 모든 것을 쏟아 가족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곧 다시 고갈되었다.


답답한 마음에 찾아간 병원에서 내려 준 진단은 조울증이라 하였다. 존재했던 대로 살아왔을 뿐인데 간단하게 모든 시간을 단정 지어 버린 것이 나는 못내 못마땅했다. 하지만 K는 고분고분하게 의사가 시키는 대로 행동수칙을 정하고 꼬박꼬박 약을 받아 챙겨 먹었다. 그것으로 모두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나 때문에 가족까지 불행하게 할 수 없다’는 의지가 그녀를 꽉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주 가라앉았고 떠오르는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가 정말 조울증이었다면 왜 우울만 남겨진 걸까. 의사의 진단과 그가 처방해 주는 약에 증오에 가까운 의심을 품었다. 병원을 찾는 K를 말리지 못한 이유는 그녀를 구해줄 줄이 내 손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달이야. 차오르면 곧 다시 사그라져. 어떤 사람들은 지구처럼 살아. 하루를 주기로 해가 뜨면 다시 일어나. 밤이 오면 잠이 들지만, 그 시간은 내일을 위한 기다림 같은 것일 뿐이야. 짠하게 화창한 날도 있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도 있겠지만, 일과는 성실한 시계처럼 멈추지 않아.
환하게 차올랐다 푹 꺼져 버리는 달은 자전의 인생이 부러워. 줄어들다 줄어들다 결국 사라지지 않을 정도만 남은 날까지 가야 겨우 다시 차오르길 기다려. 나는 사라지고 싶지 않아.


어둠 속에서 K를 길어 올린다. 언제쯤 닿을지 모르겠다.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찾는다.

달은 무엇도 망가트리지 않아. 달은 사라지지 않아. K. 어둠 속에 떠오르는 널, 아주 가는 널, 난 항상 찾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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