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얼마나 살면 한국 사람이 독일 사람이 되는 걸까?
차가 처분됐다. 처분이라는 말이 적당할 것 같다. 여차저차 차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덕분에 나의 주요 교통수단은 자전거로 급작스레 변경되었다. 내 자전거도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_적당한 중고 자전거를 사는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았다. 차로 가져올 수 없으니 자전거 이동 가능한 거리 내에서_ 남편 자전거가 나의 발이 되고 있다. 다행히 기나긴 겨울은_정말이지 끝날 듯 끝나지 않던 긴 겨울이었다_ 마침 지나갔고, 북반구 곳곳이 불덩어리처럼 후끈거리는데, 이곳, 뮌헨은 좀 더워질라 치면 비가 와서 식히고, 식히고 하는 덕에 막 덥지도 않아 자전거 타기에 딱 좋은 나날들이다.
오늘은 급 결성된 배드민턴 동호회가 첫 모임을 갖는 날이다. 뮌헨 여성 배동(멋대로 이름을 지어본다)의 남편들은 이미 일주일에 한 번, 배드민턴 모임을 하고 있다. 애도 키울 만큼 키운 우리는 육아로 찌든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할 신선한 자극들이 많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배드민턴은 배우지 않아도 되는 데다(물론 배우면야 더 좋겠지만) 실내 코트 대여비도 적절, 위치도 적절(하다고 해 두자)하여 우리 배동은 성공리에 첫 모임을 해낼 수 있었다. 비슷한 상황과 마음으로 모인 자매들은 한 시간 신나게 땀 빼고, 내일 올 근육통에 대한 즐거운 걱정을 하며, 체육관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그렇게 된 연유의 8할이 나일 것이다.
배드민턴 코트가 있는 실내 체육관은 집에서 차로 15분, 대중교통으로 1시간, 자전거로 30분 거리이다. 차가 있었다면야 자전거 탈까 고민하다가 이것저것 하다보면 시간이 촉박해져 결국 차를 타고 갔을 게 뻔한 스토리다. 하지만 나에겐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자전거 통행 3주 차, 30분 정도 거리는 가뿐하다(고 스스로 다독이고 있다).
날은 적당히 화창하고, 적당히 선선하고, 어제까지 팔다리가 후들후들 거리던 PMS 증상은 오늘 아침 어쩐지 싹 가시고 없었다. 오늘은 온 우주가 작정하고 밀어 준 '운동의 날'이었던 것이다. 가는 길에 공사로 막혀 있는 구간이 있어 살짝 돌아가야 한 데다가 어제, 블루투스 이어폰을 잃어버린 덕에 헤드셋을 챙겨 나왔더니 헬멧과 함께 착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느라 시간을 지체한 턱에 5분 전 실패, 2분 초과하여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미 한 시간 배드민턴 친 것 같은 상태로 배동 자매들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녀들을 만난 반가움에 새로운 힘이 솟아났고, 바로 코트로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은 짧은 듯 길었다. 긴 듯 짧았던 걸까? 자매들의 땀샘은 퐁퐁 솟아나는 샘물과 같아 세계 곳곳의 가뭄을 해결할 기세였다. 그러니 그저 충분했다고 해 두자. 이렇게 땀 흘려 보며 운동을 해 본 지가 언제인지, 다들 기분 좋게 지쳐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운동의 날' 피날레, 자전거길 30분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무의식은 입에게 이런 말을 뱉도록 명령했다.
"우리 남편 나 점심 먹고 오는 줄 아는데, 너무 빨리 와서 깜짝 놀라겠다."
나의 무의식의 외침을 기가 막히게 캐치한 자매들은 "그래, 너 쓰러지겠다, 점심 먹자, 어디서 먹을까," 몇 마디의 재빠른 결정으로 나를 구원해 주었다. 참 눈치가 빠르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한국인 자매들이다. 들어설 때부터 영어로 안내해 주시던 리셉션과 카페테리아를 모두 관장하시던 아주머니는 주문을 받을 때도 계속 영어로 하셨고, 우리는 계속 독일어로 대답했다. 운명처럼 한국에 사는 친구가 오늘 보내준 영상이 딱 그 내용이었다.(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따라오세요. https://www.instagram.com/reel/Cd3NlJ0jv1J/?igshid=NWRhNmQxMjQ=) 웃기지만 우리에겐 웃지 못할 현실, 이미 독일 생활 수년차인 우리는 그나마 몇 마디 하던 영어도 다 잃어버린 상태. 독일어도 잘 못하지만 영어는 더 안 나온다고요. 상황이 그렇게 됐습니다, 아주머니.
음료를 먼저 주문받자 한 친구가 Ice Kaffee를 먹겠다고 했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아메리카노가 여기 있다고?! 믿을 수 없지만 그렇다면 놓칠 수 없지.' 나도, 연이어 다른 친구 한 명도 아아의 시원함을 택했다. 하지만 곧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Ice Kaffee는 커피에 "아이스크림"이 들어가 있는 메뉴라는 걸. 처음 주문한 친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매번 당하면서도 홀린 듯 또 당한 나와 다른 친구는 그래도 처음 주문한 친구가 잘 알고 생크림(Sahne)을 빼고, 달라고 해서 텁텁하지 않고 달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들어간 커피에 만족하며 식사를 해야 했다.
뭐가 됐든 땀 빼고, 수다를 곁들여 더 맛있었던 한 끼 식사를 든든하게 하고 나자 배드민턴 한 시간 정도는 다시 뛸 수 있을 것처럼 체력이 보충되었다. 하지만 그 체력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자전거에 올라탔다. 나에게 응원을 보내며 다른 자매들도 S-Bahn(전철 종류), 자가용을 타고 각자의 목적지로 돌아갔다. 집에 거의 다 와가는데, 점심을 아주 잘 먹은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운동의 날'이 이대로 끝나는 게 아쉬워서였을까. 그보다는 '오늘은 장을 봐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집으로 가던 자전거를 돌려 동네 마트로 향했다. 차 없이 살고 난 후로 매번 장 볼 때마다 '조금만 사야지' 다짐을 하지만 다섯 가족 먹여 살리려고 대량 구매하던 버릇은 쉬이 고쳐지지가 않았고, 조금은 조금이 아니어서 돌아오는 길이 늘 아슬아슬하였다. 급작스러운 상황 변화로 자전거 장보기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핸들 앞이나 뒷좌석에 바구니는커녕 장바구니를 묶을 줄 조차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정말, 조금 사야지 다짐하며 마트로 들어간다. 아이들 아침 도시락에 들어갈 과일 몇 가지, 오늘 저녁거리, 그것만 사야지! 그런데 얼마 전 비 오던 날, 김치전으로 얼마 남지 않은 김치를 홀랑 다 먹어치운 후 김치 없이 살고 있던 이 시점에서 배추는 너무나 매혹적이었던 것이다. 배추, 딱 세 포기. 하지만 김치에는 배추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양파, 마늘, 배, 사과에 이미 김치 대신 깍두기 담그려고 넣어둔 콜라비는 배추 속이 될 것이었다. 자전거로 실을 수 있는 한도를 초과했지만, 과일 돼지가 사는 집에서 과일을 포기할 수도 35유로 이상 사면 할인받을 수 있는 쿠폰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계산대를 지난 식재료로 장바구니와 백팩을 채우다 보니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다. 자전거 앞에서 다시 한번 짐을 싸며 후회의 물결이 잔잔히 덮쳐왔지만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 웃지 못할 기념비 적인 시간을 사진으로 한방 박아두고 무거워서 곧 넘어질 것 같은 자전거의 중심을 아슬아슬하게 잡으며 돌아가는 길. 그 땐 떠오르지 않던 생각이 무사히 집에 도착하자 번뜩 스쳤다.
"야, 너 독일 사람 다 됐다!"
자전거를 타고 배드민턴 치러 간다고 하자 친구가 던졌던 그 말.
자전거로 30분 정도 거리는 가뿐하게 가는, 영어보다 독일어로 말하는 게 낫지만 독일어를 여전히 잘 못하는, 아아 대신 아카를 시켜놓고 아차, 싶어 하는, 김치를 없는 며칠을 못 참고 상황에 맞지도 않는 배추를 사는, 유의미한 관계망은 모두 한국인인,
나는.
정말 독일 사람 다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