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e Joy Mar 13. 2023

내 안에 베짱이

어느 한량의 고백

하루는 어떻게든 지나간다. 견뎌야 하는 순간은 할 수 있는 한 무감각하게 찰나의 달콤함은 무수히 반복하면서. 


작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어제 잡아 놓은 병원 예약에 맞춰 나갈 채비를 하려는데, 전화가 왔다. 9시였던 예약을 10시로 옮기겠다고. 9시에는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접수해 둔 독일어 과정 첫 수업이 있는 날이다. 학원에 미리 양해 메일을 보내 놓았지만 답은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처리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아이 학교에도 9시에 병원에 갔다가 등교할 것이라고 얘기해 두었는데, 갑자기 예약 시간 변경 이라니! 황당해하면서도 ‘독일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수긍하고 있었다. 대안이었던 다른 병원에 가기로 했다. 미리 예약을 하고 갈까 그냥 쳐들어갈까. 고민하며 병원이 여는 시간을 알아보다 병원 평점을 쭉 읽어보는데, 전화를 안 받는다,라는 평이 낮은 점수의 이유로 압도적이었다. 

그래, 좋은 이유다. 그냥 쳐들어가보자. 독일엔 주치의 제도(라고 하기엔 애매하긴 하지만 가던 의사한테만 가는 걸 그렇게 부르는 거 같다)가 있기 때문에 가정의학과와 소아과 병원은 한 곳을 정해 쭉 다니는 편이다. 다른 과에 가도 주치의 쪽으로 정기검진 결과 같은 걸 보내는 것 같다. 이렇게 불확실한 투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한 번도 관련 정보를 확인해 보지는 않았고, 경험상 그러는 것 같아 보여서 하는 소리기 때문이다. 여하튼 독일 통념상으로도, 개인적인 경향으로도 예약 없이 불쑥, 주치의가 아닌 병원에 찾아가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지만, 답답하면 결국엔 우물을 파게 된다. 


이곳 바이에른에서는 Faschingsferien이라고 부르는, 한국으로 치자면 지금은 사라졌다고 하는 봄 방학 즈음인, 지난 방학 첫 째 민트는 한국 친구들과 스키 캠프를 다녀왔다. 그전 주에 이미 학교에서 스키 캠프로 4박 5일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헬멧에 달려 있는 고글과 챙겨 준 머리부터 코까지 감쌀 수 있는 스키용 목도리는 어디다 집어던진 건지 얼굴이 발갛게 익다 못해 거의 화상을 입어가지고 왔다. 얼굴로 모자랐는지 눈까지 빨개져서 가관이었다. 그렇게 금요일 오후에 돌아온 애를 다시 월요일에 캠프에 보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참가비는 냈고, 방학 내내 컴퓨터 앞에 있으려는 아이와 씨름하는 상상을 하면 아찔했기에 최선을 다해 아이의 회복에 만전을 기했다. 그렇게 다음 월요일 민트는 무사히 스키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빨간 얼굴 대신 빨간 수포를 달고 돌아온 민트. 


캠프에서 돌아온 며칠 후 화요일, 모기에 엄청 많이 물렸다며 긁어대길래 ‘아직 날이 추운데 모기가 있다고?’ 의아해하면서도 벌레 그 이상의 가능성은 떠올리지 못했다. 벌레 물렸을 때 바르는 약을 찾아주고, 너무 가려우면 대고 있으라고 얼음팩을 꺼내주었다. 다음 날, 같이 캠프에 다녀온 다른 아이에게도 작고 빨간 수포 같은 것들이 온몸에 나고, 간지러워하는 증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아이의 엄마인 내 친구는 병원에 간다고 했다. 벌레 물린 줄만 알고, 최악의 경우 “Bedbug” 일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아이의 침구를 90도 고온으로 세탁하는 중이었다. 전염병일 가능성 따위는 정말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가능성은 총 세 가지로 좁혀졌다. 


1. 수두 2. 수족구 3. Bedbug


친구 말에 나도 얼른 병원 예약을 잡았다. 같은 증상에 진단은 달랐다. 민트는 수두, 친구 아들은 수족구. 진단에 따른 처방도 달랐다. 민트는 격리, 친구 아들은 일상 복귀. 의아하지만 의사의 진단을 뒤집기에는 또 다른 예약과 확실한 근거와 그것을 설명할 언어가 필요했기에 넘어갔다.  

다만 금요일, 주말에 병원 문 닫기 전에 다시 병원에 갔다. 월요일, 민트의 등교 허가를 위한 진단서를 받으려고. 의사 선생님은 이대로는 학교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진단서도 써 줄 수 없다고. 5일에서 7일 정도는 집에 있어야 한다고. 주말이 지나면 이미 6일이 지나는데.. 수포가 눈에 띄게 가라앉아야 한다고 했다. 안 써준다는 걸 써내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는 노릇. 답답한 심정으로 주말을 보냈는데, 아들 몸에 있는 수포는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체 모를 증상 발발의 8일 차, 다시 화요일이 되었고, 다음 날 나는 독일어 수업에 들어가야 할 몸이었다. 온라인 수업이긴 했지만, “독일어" 하는 단어만 떠올려도, “400시간!” 생각만 해도, 달력에 빼곡히 들어찬 수업 일정이 눈앞에 선해지며 가슴이 갑갑해졌다. 이미 갑갑한 나에게 더 이상의 시련은 주지 마시라. 

하지만 내 사정은 내 사정이고, 독일의 병원은 냉정하다. 화요일 오전 아들이 학교에 못 간 기간에 대한 진단확인서를 받으며, 오늘 오후에 검사받고 내일은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했다. 나를 상대하던 직원은 당일 오후는 안 된다면서 다음 날 12시로 예약을 잡아 주겠다 했다. 너무 늦다고 용기 내어 말했더니 아침 9시로 다시 시간을 조정해 주었다. 그리고 예약 당일 날 아침 다시 10시로 미뤄진 것이었다. 

대안으로 정한 병원은 8시 반에 문을 열었지만 8시 조금 넘어 민트를 데리고 나갔다. 다행히 아침 일찍 무언가 종이를 들고 병원으로 들어가는 아이와 아빠가 보였다. 용기를 내어 병원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더. 


한참을 기다리니 드디어 문이 열렸다. 병원에 들어가니 방언이 터졌다. 그 간의 사정을 한 문장 단위로 끊어서 재빠르게 설명했다. 


우리 아들 수두 걸렸어. 근데 같은 증상의 친구는 수족구래. 이미 얘는 8일간 집에 있었어. 얘 확인서 받아서 다시 학교에 가야 하는데, 오늘 우리 아들 주치의 병원에 의사가 없대. 


면밀히 말하자면 오전 10시까지 없는 것이지만, 그 정도는 독일어 미숙자의 한계와 버무려 어물쩍 넘어가자. 내가 학원에 가야 하는 사정까지 다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말이 필요하다. 다행히 구글 평점과는 달리 병원 직원은 친절했고,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잠시 진료실에 기다리고 있으니 맘씨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영어와 독일어 중 뭐가 편하냐고 물었다. 영어가 편하다고 대답했지만, 듣는 건 영어가 편하고 말하는 건… 한국어가 편해요. 선생님이 영어로 하시는 말에 무색하게 독일어로 대답했다. 결과는 더 이상 ansteckend 하지 않아. 문맥상 알아들었지만 재빨리 핸드폰을 두드려 단어 하나 챙기고, 홀가분한 당케쉔을 날리고 5유로짜리 진단서를, 마침내 얻게 된 진단서를 손에 들고 아들을 학교로 보냈다.  


생활적인 면에서 강인하다고 할 수는 없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물렁해 빠진 나를 별것도 아닌 일에 악착을 부리게 만드는 여기는 독일. 

그래서 오늘 무사히 제시간에 첫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행복한 결말, 아니 열린 결말. 




요즘 나날들은 만만하지가 않았다. 뭐가 하나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자꾸만 어딘가 턱턱 걸려 돌아가지 않는 고장 난 기계 같은 나날이었다. 뻠프질을 하고 기름을 칠하고 걸리적거리는 부품은 미련 없이 빼 버리고서야 겨우 돌아가는 기계. 이메일을 쓰고 전화를 하고, 대안을 찾고, 이런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뭐가 하나 해결됐나 싶으면 또 다른 일이 터졌다. 


"오늘은 그림을 그릴 거야!"


그렇게 선언한 이유는 나를 행복하게 할 이벤트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고도 이틀이 지나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내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그도 그럴 것이 초등 1년에 몇 개월 다닌 미술학원 이후로는 유튜브로 다른 작가님들이 그리는 걸 보고 따라 그리는 게 회화 관련 배움의 전부였던 터라) 스트레스가 더 쌓였지만, 묵혀 뒀던 상자는 열렸고, 꽉 막혔던 마음에도 자그마한 구멍이 낫다. 


삶의 문제들로 골몰하며 보내던 어느 날 남편에게 “그림이나 그리고, 책이나 읽고, 노래나 부르며 살고 싶다고, 나는 공주였던 게 아닐까?” 했더니, “천생이 놈팽이"라고 화답했다. 확실히 놈팽이 쪽이 더 어울리긴 하다, 어감상 한량 정도로 표현해 두자. 하지만 그림이니, 책이니, 노래니 이쪽은 그나마 생산적인 편이고 대체로 놈팽이는 드라마나 잠 쪽에 치우쳐 있다. 드라마도 그나마 에너지가 있을 때 말이지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여 있을 때 나는 자고 또 잔다. 그래도 계속 잠이 온다. 

그래도 이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내 안의 이 베짱이(놈팽이) 덕분이라고, 믿는다. 베짱이가 칠해주는 기름칠 없이 이 퍽퍽한 생활을 어떻게 견뎌나가란 말인가. 

대 혼란의 첫 온라인 독일어 수업 후 점심도 거르고 잠을 청했다. 저녁 전에 에너지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오늘의 베짱이는 너무 지나쳤나. 그리하여 지금 말똥히 깨어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내일(오늘) 수업 어떻게 하지, 고민하면서도 이러고 앉아 있는 이유. 

머릿속에 박혀 있던 내일 걱정을 굴러 들어와 빼낸, 


하루는 어떻게든 지나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00_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