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됐고, 일단 집부터 사!
서울에서 내가 처음 살았던 집은 오래된 석촌동 빌라의 반지하방이었다.
대문으로 들어가서도 뒷마당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주방과 방이 제법 넓었고, 반지하답지 않게 햇빛도 잘 들었다. 졸업 후 학원강사를 하며 엄마 몰래 작가교육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엄마 아빠는 철석같이 내가 임용고시를 볼 줄 믿고 있었다. 그런 엄마 아빠를 깜찍하게 속여 넘기고 전세금을 받아 구하는 집이었다.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높은 계단을 위태롭게 올라가야 하는 옥탑방 아니면, 두 평도 안 되는 원룸, 그리고 반지하가 선택지의 전부였다.
청춘드라마에 나오는 근사한 오피스텔도 케리가 사는 뉴욕의 아파트도 아니었지만, 싸구려 침대 하나, 책장 하나로도 내방은 이미 충분했다. 5분만 나가면 석촌 호수가 있고, 집에 가는 버스 터미널도 가까웠다.
나중에 봤더니 전라도에서 온 동기들은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에 집을 얻고, 나처럼 강원내륙에서 온 애들은 동서울 터미널 근처에 집을 얻었다.
본인들도 인지하지 못한 본능 같은 선택이었다.
여름이 되고, 장마철이 되자 집에 물이 넘쳤다. 책들과 전기밥솥을 침대 위로 내던지며 처음으로 막막함에 울었다. 얼마 전 영화 기생충을 보며 고개를 돌린 건 그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 집에서 2년을 살고, 여의도가 가까운 목동역 근처로 이사를 했다. 반지하에서 당한 설움을 잊지 않기 위해 2층 원룸으로 들어갔다. 학원 강사를 하며 모은 돈이 제법 있었고, 첫 시작이 월세가 아니었던 덕에 막내 작가 생활을 하면서도 얼마간 모은 돈이 있었다, 나는 엄마가 준 전세금에 보태 이 집에 들어갈 꿈에 부풀었었다. 그러나 의외의 복병이 있었다.
“전세금 갚아. 그거 빌려준 거야. 이 만큼 키웠으니 이제 알아서 살아”
엄마는 처음 주었던 전세금을 회수해갔다. 너무 서운해 아무말이나 해대고 싶었지만, 얼굴이 너무 닮아 계모라고 우길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계약해둔 원룸에 월세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를 갈았다.
“두고 봐. 보란 듯이 돈 모아서 다음엔 전세로 갈 거야”
그러나 그다음에도 빌라 월세를 살았다. 월세로 살며 돈을 모으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죽을 둥 살 둥 천만 원을 모으면 집주인은 꼭 2천만 원을 올려달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모자란 돈은 다시 월세가 되어 돌아왔다. 젠장할. 호화 주택도 아니고, 이런 코딱지만 한 집에 매달 삼 십만원이라니...
그때 나보다 어리지만 세상살이에는 훨씬 도가 튼 후배가 말했다.
“문래동에 내가 봐 둔 원룸 아파트가 있는데, 8천이야. 그거 언니도 사자”
"대출? 나 그런 거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이자가 너무 많이 나가지 않아?"
"월세 내는 것보다 이자 내는 게 남는 장사야. 원금도 같이 상환하다 보면 집값도 오르고. 같이 사자"
내가 가지고 있던 보증금은 꼴랑 삼천이었다. 지금 내는 월세 삼십도 허덕대는데 원금에 두배 가까운 5천만 원을 빌릴 엄두가 안 났다. 지난한 후배의 설득에도 결국 나는 물러섰고, 후배는 그 집을 샀다.
3년 후 나는 조금 더 변두리인 강서구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비록 18평의 작은 아파트였지만, 누가 뭐래도 아파트였다. 게다가 전세였다. 서울에서 홀로 독립한 지 11년 만이었다.
11년 만에 반지하와 원룸과 빌라 투룸을 거쳐 아파트로 온 것이다. 누군가는 비웃을지 몰라도 나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대견했다. 어찌나 대견한지 홀로 도배까지 했다. 삐뚤빼뚤 줄이 안 맞으면 어떠랴, 전셋집인데. 처음으로 소파도 샀다.
다시 후배가 말했다.
“차라리 언니 그 집을 사지 그래. 거기 곧 9호선 뚫린대”
집값은 2억 4천이었다. 내가 가진 돈은 달랑 1억이 전부였다. 역시 두배 가까운 돈이 모자랐다. 그리고 나는 변하지 않았다. 5천 대출도 무서웠는데 장장 1억 4천을 나 같은 새가슴이 빌릴 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그렇게 기회는 또 물 건너갔다. 후배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혼자 아파트를 샀다.
물론 나보다도 적은 원금에 대출이 70%가 넘었다.
“쟤는 어린애가 참 손이 커. 아파트를 두 채나. 버는 거 다 이자로 나가도 괜찮을까?”
“쟨 부모님이랑 같이 살잖아. 나도 서울 살았음 집 샀겠다”
"이자 낼 돈으로 적금을 부으면 그 돈을 못 모으겠지? 역시 우린 경제개념이 꽝이야"
형편이 비슷한 친구들과 모여 그런 얘기를 했던 것도 같다.
2015년 갑자기 아파트 값이 한풀 꺾이며 우리 집보다 작은 평수인 15평 아파트가 1억 6천에 나왔다.
그래, 6천이라면 대출받아도 되지 않을까? 드디어 기회가 온 것 같았다.
엄마까지 올라와 함께 집을 계약하러 갔다. 그런데 매물이 하필 1층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하수구 냄새가 났다. 게다가 베란다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실을 들여다봤다. 덜컥 겁이 났다. 갈등하는 나를 보던 엄마는 다른 매물을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래, 경제관념 있는 엄마가 하는 말이니 맞겠지’
그러나 그건 실수였다. 엄마는 평생 아파트에, 서울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결국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그사이 후배가 샀던 문래동 아파트는 8천에서 3억이, 1억 6천이던 그 1층의 아파트는 3억 4천이 되었다.
젠장할, 그러니까 그때 집을 샀어야 했던 거다.
누군가 내게 지금까지 살며 가장 후회하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울에 살면서도 대출받아 집을 사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겠다.
그렇다. 모든 것은 집 때문이다. 오늘날 내가 당장 한 달도 일 안 하고 놀 수 없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후가 걱정되는 것도, 세상사에 자신이 없는 것도 결국 다 집 때문이다. 집만 있었다면 나는 좀 더 당당했을 것이고, 다른 일을 시작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이렇게 또다시 전셋집을 알아보며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나는 그토록 소심하고, 바보 같고, 멍청했을까?
내가 너무 순진했다. 그렇게 대출을 무리하게 받지 않아도 아끼고 저축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살 곳쯤은 너끈히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대궐 같은 집을 원하는 것도 아니니 그게 뭐 어렵겠나 싶었다.
사실은 믿는 구석도 있었다. 일로 만났던 수많은 부동산 전문가들이 집값이 곧 내려간다고 매년 희망을 줬다. 아니다, 이건 취소.
전문가들의 의견은 의견일 뿐이니 참고만 하라고 그렇게 대본을 써댄 내가 할 소리는 아니다.
이젠 대출도 엄청 까다로워진 데다 내가 가진 돈의 두배 넘는 대출을 받아도 집값을 못 따라간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참다 참다 최고가에 살까 두렵기도 하다. 좀 있으면 다시 전세기간이 만료된다. 어쩌면 일부를 월세로 돌리든지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지. 또 이렇게 가난을 체감한다.
누군가 나에게 타임머신을 30초만 빌려준다면,
나는 당장 30대의 나에게 달려가 당장 대출받아 집부터 사라며 뒤통수를 후려치겠다.
누군가는 허영이네, 가랑이가 찢어지네 욕하더라도 됐고. 귀를 막고 대출받아 집부터 사라고. 분수에 맞는 짓만 하려다간 분수에 빠져 죽는다고.
그나저나 죽기 전에 내 집을 가질 수는 있을까.
아, 진짜 나도 집 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