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백일홍은 백일동안 피어있지 않는다

프리랜서의 여름완주기록

by 한꽃차이

여름에 가장 오래 피어있는 꽃이 있다. 백일 간 피어있다고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배롱나무. 배길홍, 배기롱, 하다가 배롱이 되었다고 한다. 교장선생님 성함처럼 한 글자 한 글자 똑바로 발음해야 할 것 같은 목, 백, 일, 홍에서 태명 같은 배롱까지 귀여운 진화를 거쳤다. 배롱 배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귀여운 어감이다. 몇'배'로 '롱'런한다고 기억해도 되겠다. 배롱나무는 여름 끈기의 상징이니까.


폭염경보가 하루 중 가장 먼저 오는 문자인 날들, 보송한 기분을 유지하기 어려운 텁텁한 습기, 어딜 또 다녀와야 하나 그냥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되는 긴 여름방학 - 여름은 뭔가 시작하기도 지속하기도 쉽지 않은 계절이다. 꽃선생님에게도 비수기이다. 누가 요즘은 수업 없냐고 하면 여름은 보릿고개라고 웃기도 한다. 가을이 보장되지 않는 프리랜서들은 알 것이다. 이럴 때 무언가 해놓느냐 해놓지 않느냐에 따라 하반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파종할 힘이 솟지 않는 시기, 나는 배롱나무로 버틴다. 집 근처 구석에 있는 내 키보다 조금 작은 7년 차 친구, 배롱이라고 이름 붙였다.


올여름은 유난히 실패가 많았다. 대한민국에서 나만큼 많고 다양한 꽃수업 경력을 가진 강사는 드물 거라고 자신하지만, 꽃수업의 특성상 몸값이 오르진 않았다. 예산은 오히려 매년 줄어들고 기업 동호회는 하나 둘 없어지고 코로나 후 힐링 클래스 유행은 지나갔다. 적당한 강사이면 되는 곳에서 나는 필요 이상의 오버스펙이다. 참 많이도 떨어졌다. 아무래도 예산이 부족하다는 전화를 받고 통과되지 않는 견적서를 보내고 답이 오지 않는 기획서를 꽤나 만들었다. 낙방할 때마다 배롱이 곁에 선다.


사람들은 나무에 곱게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만 보지만 내 시선은 나무 발치, 바닥에 무수히 떨어져 있는 너저분한 꽃잎에 머문다. 배롱이는 깔끔쟁이는 못 된다. 이렇게 한가득 떨어져 있으면 꽃이 줄어들 만도 한데 여전하다. 애초에 배롱나무꽃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한 번 피어난 꽃은 며칠 만에 떨어지고, 그 자리에 또 다른 꽃이 피어난다. 이렇게 피고 떨어지기를 무한반복하며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마치 변함없이 여름 내내 피어있는 것처럼. 더위에도 태풍에도 끄떡 않는 것처럼.


배롱나무만 다들 보지 않는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을까. 나만 그럴까. '오래 피어있느냐'가 아니라 '다시 피워내느냐'로 나와의 긴 싸움을 감당해 나가는 동료들이 생각난다. 고난에도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도 내 눈에 바닥이 보이지 않을 뿐이겠지. 하나, 둘, 다 헤아릴 수 없는 꽃잎 수처럼, 작심 3일을 수십 번 다시 하며 여름을 보내고 있는 배롱이들.


발치의 꽃잎들을 다시 불러볼까. 실패의 잔해가 아니라 도전의 희망으로. 뜨거운 여름, 뛰지는 못해도 걸었다는 증거물이라고. 주저앉았다가도 수없이 다시 일어났다는 여름완주기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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