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름, 메밀국수를 먹기 전에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 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 소설이 생각나는지? 고등학교 교과서에 있던 '메밀꽃 필 무렵' 속 장면이다.
가뭇가뭇한 줄거리를 소환해 보자. 떠도는 장돌뱅이 허생원은 봉평장을 빠뜨리지 않는다. 하룻밤 함께 하고 다시 만나지 못한 한 처녀와의 인연 때문이다.
충주댁과 농을 한다고 허생원에게 뺨을 맞은 동이. 별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허생원의 당나귀를 보호해 준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반복되면 관계가 빠르게 깊어지기 마련. 사과하는 허생원에게 동이는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을 낳고 집에서 쫓겨나 망나니 의붓아버지와 산다고.
어머니 고향이 봉평이라는 말에 허생원은 발을 헛디뎌 개울에 빠지고, 동이 등에 업히게 된다. 어머니가 아비를 찾지 않느냐고 묻자 늘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답하는 동이. 허생원은 동이를 따라 동이 어머니가 있는 제천으로 가기로 한다.
생생하고 아름다운 묘사를 느낄 틈 없이 예상문제와 답을 외웠던 시절이지만, 메밀꽃이 소금을 닮았나 보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때 메밀꽃 사진을 보았더라면 소설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강렬하게 남았을 텐데.
플로리스트들도 많이 쓰는 꽃은 아닌 메밀꽃. 그 초여름날도 새로운 꽃 없나 꽃시장을 샅샅이 둘러보다가 금광처럼 발견했다. 파는 곳도 많지 않고 존재감이 강하지도 않지만, 나의 시선은 늘 조그맣고 조용한 존재에 머무른다.
늦게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메밀꽃이 이토록 소금을 닮았다는 걸. 제조 매뉴얼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1. 가늘고 연한 연두색 풀줄기를 고른다.
2. 조청을 엄지손가락 길이만큼 꼼꼼히 묻힌다.
3. 굵은소금 가득한 자루에 푹 넣었다가 조심스레 뺀다.
4. 제일 가는 진분홍 꽃소금을 한 꼬집 뿌린다.
5. 조청이 굳을 때까지 진중하게 기다린다.
꽃의 처음 창조 과정을 오밀조밀 상상해 보는 이과생 플로리스트에게, 메밀꽃 만들기는 특히 즐겁다. 단짠단짠 솔트카라멜 같은 오묘한 맛이 나겠지.
"작은 꽃이 정말 큰 역할을 해요. 있고 없고가 정말 다르죠?"
수업때마다 나는, 조그마한 존재가 얼마나 커다란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 눈으로 보여준다. 큰 꽃만 사도 재료비는 빠듯하지만, 언젠가 자신이 보잘 것 없이 느껴질 때 이 말을 떠올리며 위로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눈에 확 띄는 꽃들이 시선을 끌어온다면, 존재감 없는 꽃은 시선을 붙잡는다. 작품이 완전히 달라지게 한다. 마치 요리할 때 소금처럼. 셰프의 시크릿 재료 1g 처럼, 작은 꽃의 큰 비중을 찾아주는 희열을 누리며 부케 수업을 했다. 하얗기만 하지 않고 진분홍도 섞여있기에 상큼하다.
히말라야 핑크 소금이 있듯, 메밀꽃에도 진분홍 컬러가 있다. 면적이 큰 꽃이면 너무 튈까봐 넣기 쉽지 않은 색인데 작아서 콩알콩알 귀여운 포인트로 쓴다. 사이사이 길게 써도 숨은 듯 튀지 않는다. 다른 꽃을 가리지도 않는다. 연분홍과 보라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준다. 참 성격도 좋다.
이 여름, 그러니까 메밀꽃 필 무렵, 메밀국수 먹을 때, 삼겹살에 소금 톡톡 뿌릴 때 문득 메밀꽃을 떠올려준다면 고맙겠다. 책을 읽다가, 생소한 꽃이름이 나와서 나를 불러준다면 언제든 꽃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특히 소금같은 존재라면 더욱 반갑게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