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몇 년을 매일같이 보던 친구가 있었다. 별의별 얘기를 다 털어놓는 사이였다. 삶의 갈림길이 우리를 몇 번 찾아왔고,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친구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을 종종 노골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드러나는 갈등이나 다툼은 없었지만, 대화에 교집합이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보를 받았다.
"우리 이제 공감대가 없는 것 같아. 그만 연락하자."
나 역시 불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아니야 나는 그럴 수 없어" 라며 큰 상처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파장은 다른 관계로 퍼졌다. 지금은 잘 지내고 있는 누군가가 언젠가는 내게 저런 말을 하지 않을까, 한 번씩 소중해서 걱정되었다. 마치 신호등에 정차해 있다가 뒤차가 박았는데 온몸이 멀쩡하다가 이따금 신호등을 보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증상처럼.
몇 달 후, 다시 톡이 왔다. 친구가 한참 전에 부탁해 뒀던, 미국변호사 시험 추천 메일 때문이었다. 지정인 변경이 불가능했다. 후회했다. 내가 아닌 친구가. "이럴 줄 알았으면 너한테 부탁 안 할걸."
그럼에도 메일을 썼다. "She's the smartest person I know."만 기억나지만, 꽤나 공들이고 고민하면서. 마지막으로, 선물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그 정도는 해주고 싶었다. 내 힘든 시절을 함께 해줬으니까. 네가 있다는 게 그토록 힘이 되었고 그걸로 충분하니까. 너를, 그 시간을 아름답게 남기고 싶으니까. 그리고 결심했다. 지금 곁에 있는 인연이 끝나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더라도, 조금 더 후회 없는 끝맺음까지는 어찌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고.
시절 인연이 따로 있을까. 한평생 알콩달콩 살던 부부도 같은 순간에 이 세상 소풍을 마칠 수 없는 게 인생인데. 가족 같은 반려동물도 짧은 생을 사는데. 꽃도 시절인연인 생명체다. 계속 함께 할 수 없는 꽃처럼, 인연도 짧아서 소중하다. 꽂아둔 꽃이 시들어갈 때 놓치고 사는 것들이 떠오른다. 2주 정도밖에 곁에 머물 수 없지만 그렇게 스물여섯 번만 조금 더 힘을 내면 1년이 지나간다. 꽃보다 세월이 빠르다.
그렇기에 다시 마주칠 일 없는 찰나 인연에게도 꽃을 건넬 수 있다. 대부분 1회인 꽃수업에 백 번 볼 것처럼 정성을 들일 수 있다. 진심을 다한다면, 횟수와 기간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닐 게다. 어떤 관계는 0.3cm로 어긋나고, 어떤 끝은 불합격 통지처럼 쓰라리겠지만 다시 피워 올리는 배롱나무처럼 살아가기를 선택할 수 있다. 오른손으로는 꽃을 다듬고, 왼손으로는 묵직한 삶을 끌어안으며.
인연이 지나가도, 꽃은 선물할 수 있다. 누나네 집 근처에 살고 싶다던 20년 지기 동생이 멀지 않은 곳에 갑자기 이사를 왔다. 커다란 창이 보이는 쓸쓸한 납골당에 두고 올 동생처럼 소박한 꽃을 만들 때, 꽃일을 하며 받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위로를 받는다. 누군가가 또 세상 소풍을 마쳐도 그 사람을 닮은 꽃으로 추억할 수 있겠지. 아니 그전에 꽃 한 번 더 건넬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