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그 부케를 고르지 말아 주세요

'한번뿐이니까'를 17번 통과하면

by 한꽃차이

부케는 예쁘면 될 것 같지만, 배울 때 추천 공식이 존재했다. 체격이 있는 신부님은 풍성한 부케(부케가 작으면 사람이 더 웅장해 보인다며), 아담한 신부님은 너무 크지 않은 부케(부케 때문에 사람이 파묻힌다나). 키가 크고 마르면 늘어지는 부케도 가능하고 그냥 화보. 야외웨딩에는 내추럴하고 컬러감 있는 부케, 호텔과 성당은 클래식한 부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그 무엇도 신부님의 취향을 넘어서는 요인이 될 수 없다. 결혼식은 한번뿐이니까. 이 '한번뿐이니까'를 수없이 통과하면 부케, 정확히는 부케를 든 결혼식 사진이 남는다.


9월의 신부님은 '데이지'를 꼭 넣고 싶어 하셨다. 러블리한 느낌이 좋다고. 카톡으로도 사랑스러운 말투가 음성지원되는 듯하다. '어쩜 본인을 똑 닮은 꽃을 딱 아실까' 싶다. 노란 동그라미가 하얗고 긴 꽃잎으로 둘러싸인 소녀 감성 가득한 꽃. 계란꽃, 데이지, 마가렛...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부르지만 가을엔 데이지가 없다. 꽃시장에 나오는 꽃은 구절초다. 그래도 신부님이 데이지라고 부르시면 데이지인 거다.

문제는 데이지만으로 만든 부케와 카라에 데이지를 넣은 부케 사이에서 고민 중이시라는 점. 예식장이 블랙이라 하객들 자리는 어둡게 하고 버진로드만 위에서 강한 조명이 내려올 텐데, 데이지는 그림자가 진다. 그러면 사진이 예쁘게 안 나올 테고, 고급스러움도 떨어진다.


물론 조심스럽게 의견은 드리지만 강하게 밀어붙일 수는 없다. 단 한번뿐인 날이니까. 절대 후회가 남으면 안 된다. 과할 만큼 강력한 공감 능력 때문이기도 하다. 아름다움, 고급스러움, 매혹적임 등 꽃과 사람이 지닐 수 있는 매력은 백만가지지만, 러블리함만 한 게 있을까. 내가 나타내고픈 바로 그 느낌을 반드시 그 꽃으로 표현하고픈 그 마음, 나도 매번 느끼기에 꽃을 하는 걸.


드레스를 결정할 때까지 생각해 보겠다고 하신다. 그동안 꽃시장에 갈 때마다 꽃을 탐색하고, 레퍼런스를 찾아보며 여러 대안을 마련한다.

1. 데이지 부케는 신부대기실이나 피로연장에서 들고 웨딩홀에서는 다른 부케를 들면 어떨까요?

2. 데이지와 사랑스럽게 어울리는 꽃은 이런 꽃들이 있어요.

3. 드레스와 어울릴만한 부케로 이런 건 어떨까요?


드디어 드레스 사진을 보내오신 날. 아무래도 카라 조합이 드레스에 어울릴 것 같다고 하신다. 휴, 한숨 놓인다. 비즈가 촘촘한 드레스인데 살짝 웜톤이라 보석 같은 아스틸베가 어울린다. 아스틸베와 카라의 조합이면 일단 95점 이상이다.


드디어 전날. 예약한 꽃들을 모셔온다. 올해 카라 가격은 예년의 몇 배나 된다. 작년에 카라로 부케 수업도 많이 했던 게 꿈같다. 한단(5송이)에 2만 원대. 게다가 꽃잎에 그린이 섞인 카라가 대부분. 완전무결한 느낌의 하얀 카라는 더 비싸다. 부케에 13~4송이가 들어가고 부토니에에 1송이가 들어가니 3단 구입해도 되지만, 최상의 카라만 골라 쓰기 위해서는 4단이 필요하다.


카라 4단에 112,000원, 아스틸베 2단에 46,000원, 구절초 1단에 2만 원, 부토니에용 난 2단에 16,000원, 피로연 부케로 쓸 주먹만 한 로라장미 2단에 46,000원, 도합 24만 원. 부케박스, 코사지핀, 리본, 진주핀, 포장용 습자지와 비닐까지 하면 25만 원. 헤어장식으로 쓸 클레마티스도 2만 원대인 고급꽃이지만, 단골집 사장님이 오늘 꽃 아니라고 거저 주셨다. 어느 날에나 감사함은 존재한다. 두세 송이만 싱싱하면 되니 충분하다. 이렇게 부케 하나에는 꽃다발을 몇 개 만들 예산과 노력이 들어간다.


세 남자가 잠든 후 제작을 시작한다. 다듬어서 물 올려둔 꽃들을 꽃냉장고에서 조심조심 꺼낸다. 우선은 선별. 조금도 흠 없는 카라와 아스틸베를 모은다. 흠이라고 해도 내 눈에만 보이는 건 안다. 내가 "이 꽃잎에는 조금 상처가 있어요"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미간에 주름이 생기도록 들여다봐도 "잘 모르겠는데요" 하실 그런 부분. 크기도 적당해야 한다. 너무 크고 줄기가 굵으면 투박해지고 작으면 고급스럽지 않다. 구절초 역시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화형이 대칭을 이루는 것들만 고른다.


부케는 싱싱함을 유지하도록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야 한다. 손의 온기에도 시드는 게 꽃이라, 수족냉증이 직업 적합성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역시 세상에 나쁘기만 한 건 없다. 심지어 찬물에 손을 넣었다가 작업하기도 한다. 특히 카라는 대파 같은 줄기를 갖고 있어서 서로 밀착되기 때문에 한 송이 방향을 10도만 돌려도 모든 꽃이 어그러져서 다시 만들어야 할 수도 있다. 어렵다. 그러니 많이 만들어보아야 한다. 더 뚝딱 잘 만들고 싶어서 부케샵에서 근무도 하고 있을 만큼 부케에 진심인 나. 속으로 외치며 작업한다. '한번뿐인 부케, 한 번에 끝내자!'


타이머를 맞춘다. 숨을 훅 들이마시고 시작! 곧게 뻗어 있는 카라는 중앙에, 꽃잎 주름이 구불구불 예쁜 카라는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줄기가 살짝 곡선인 카라는 가장자리에, 나머지는 덜 보이는 뒷부분에. 어느 위치에 배치할지 미리 정해뒀어도 만들다 보면 레고처럼 완벽히 계획대로 되지는 않기에 순발력과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와, 내가 봐도 완벽해! 머릿속에 그린 딱 사랑스럽고 우아한 느낌 그대로다.

당일 아침, 날씨가 맑다. 새벽부터 나와 용산에 포토존 설치를 하고 강서구에 있는 예식장으로 향한다. 데이지 신부님을 실제로 만나니, 톡으로 느꼈던 사랑스러움이 더욱 예사롭지 않다. 친정부모님과 통화는 애교가 넘치고, 하객을 대하는 말투도 '라'톤이다. 주변 명도를 올리는 화사한 에너지에 기분 좋게 기꺼이 물들어가면서 상상한다. 다정한 말을 듬뿍 들으며 크는 건 어떤 삶일까. 그렇다면 나도 '라'톤을 구사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물론 A환경에서 자란다고 B로 큰다는 법칙은 없다. 삶에는 법칙이 없다는 법칙만 존재한다. 햇빛 찬란하지 않은 사람의 그늘에는 쉼이 필요한 사람들이 깃든다. 그렇게 듣게 된 수많은 비밀 이야기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다. 대나무숲처럼 쓰임 받는 삶도 꽤 괜찮다. 인생 한번뿐이니까.


긴장으로 잠을 잘 못 잤다는 신부님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면 잊었던 피로가 눈꺼풀을 덮쳐오는 듯 동그란 눈을 깜빡거린다. "두 번은 못 하겠어요." 잠시 아래를 향한 시선에 부케가 닿으면 다시 환하게 웃는다. "아 정말 너무너무 예뻐요! 행복해요."


결혼식과 피로연 사이, 신부님이 블랙 새틴 드레스로 갈아입는다. 블랙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어주는 진핑크 피로연부케로 바꿔드리고, 같은 색 클레마티스로 헤어장식을 해드린다. 한번뿐이니까. 뒷모습 사진을 보여드리자 신부님이 꺄악 감탄한다. 에너지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피로연장, 흔치 않은 부케에 친구들이 예쁘다고 한 마디씩 한다. 깜찍 발랄 신부님은 나 오늘 뒷모습까지 예쁘다며 빙그르르 발레리나처럼, 아니 좀 더 빠르고 귀엽게 돈다. 신혼여행지에서도 춤추는 듯한 발걸음으로 다니시겠지. 과묵하다는 핀란드 사람들, 오로라보다 밝은 K - 행복 바이러스에 팡팡 전염되리라. 산타클로스 마을이 더 흥겨워지겠지. 오늘의 댄싱퀸님, 피로연장을 한 바퀴 돌아오니 꽃이 한두 송이 빠져있다.


오늘의 예쁨 완료. 바로 옆 대학병원 주차장으로 돌아간다. 주차장이 모자라서 웨딩홀에서 안내해 준 주차장이다. 몇 주 전, 장례식장 오느라 왔던 곳이다. 결혼식과 삶뿐 아니라, 오늘도 한번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소중함은 피로를 이긴다. 식이 끝나자마자 부케를 맡기러 가서 오브제로 만들어 간직하겠다는 신부님처럼, 매일 퇴근 후 이곳에 아빠를 보러 왔다던 언니처럼. 내년에는 안 할 것처럼 불꽃 축제를 보러 모인 바람직한 사람들을 피해 집에 가자. 나의 가족, 내 삶의 부케들에게. 라 톤은 어렵겠지만 솔 톤 정도는 자연스럽게 나올 만큼 반가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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