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춧가루를 얻으러 뛰다

플로리스트의 행사 데코 브이로그

by 한꽃차이

'와, 남의 돈으로 꽃을 사서 꽂을 수 있다니!'

꽃일을 처음 할 때 느꼈던 감동이다. 연습하고 시험준비하고 샘플 만드느라 샀던 꽃이 워낙 많아서다. 노력과 시간 대비 남는 게 있는지 따지다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이 첫 마음을 떠올린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싶어진다.


남의 돈으로 꽃 사니 좋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도 한 번씩 있다. "그렇죠"라고 그저 웃고, 굳이 말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요구도 함께 준다. 꽃값, 특히 행사용 고급꽃의 가격을 모르니 당연하다. 작은 업체는 예산이 없으니 꽃은 서비스로 (하지만 풍성하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유명한 업체는 이 가격이면 다른 할 곳 많다는 고자세이다. 예산이 있는 곳은 엄청난 기대를 한다. 어쩌면 어떤 일을 하든 프리랜서라면 많이들 이 트리플 콤보 상황을 겪겠지. 괜찮다. 행사데코 7년 차 플로리스트는 어떤 예산이든 그 이상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


남의 돈은 많을수록 좋다. 특히 150여만 원어치쯤 되면 심히 신난다. 보내드린 시안 중에 '트로피컬 느낌으로 화려하게'를 골라주셨을 때는 더욱 기대된다. 가을의 문턱이고 테이블보가 블랙이니 강렬한 다홍으로 덮자. 국제행사답게 시선을 사로잡도록. 이 에르메스 컬러조합을 애정한다.


테이블 센터피스 5개는 미리 만들어간다. 가장 가까이에서 보이고 사진 찍힐 거리인 꽃이기 때문에 힘을 많이 줘야 한다. 오늘의 화룡정점은 파인애플. 한 대에 만원이지만 만원 이상의 존재감과 유니크함을 더한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순간 귀가 쫑긋. 여기저기서 감탄이 들려올 순간이니까. 이 뿌듯함에 이 일을 하니까. 다른 부서 사람들이 다가와 물어본다. "이렇게 얼마예요?" "도자기 대신 플라스틱 쓰면 가격이 좀 낮아지나요?"


단상 센터피스 6개는 높게 만들어야 해서 현장에서 만든다. 부채처럼 생긴 안스리움을 더 넣고 싶은데, 작년에 3500원이던 이 꽃이 올해는 8000원씩 한다. 그나마 구하기도 어려워서 예약해 놓고 모셔왔다. 35송이에 28만 원. 꽃값이 이렇게나 어마무시한 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그림을 그려주기란, 얼마 안 남은 물감으로 사람만 한 하얀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일처럼 느껴진다.

6개를 한 시간 반 만에 만들었다. 음식이 놓인 테이블에 꽃을 꽂고도 시간이 남았다. 케이터링팀에게 물어본다. "단순노동할 만한 것 없나요?" 조금이라도 손을 보탤 수 있는 날은 기쁘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꽃을 치우는 어마어마한 노동을 케이터링팀이 해주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가 먼저 가는 호사를 누리고 이 일을 할 수 있다.


폭군의 셰프 속 수라간 같은 화목한 분위기도 일하는 동안 나를 행복하게 한다. 이날은 심지어 드라마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고춧가루 실종!


일단 "제가 다녀올게요" 하고 뛴다. 행사 시작이 코앞이라 마트까지 갈 시간이 없다. 옆건물 편의점에는 역시나 없다. 복어전문점이 눈에 들어온다. 사정을 설명하고 고춧가루 한 컵만 팔아달라고 간절히 부탁드린다.


알았다고 주방으로 간 직원이 한참 동안 나오지 않는다. 주방에서 안 된다고 하는 거면 어쩌지? "아유 마트가라그래" 톡 쏘는 이모님 모습이 그려진다. 다른 식당에 가보면 되지만 시간이 자꾸 뛴다. 내 발도 가만 못 있고 왔다 갔다 한다.


체감으로 10분이 흐른 후 마침내 직원이 고춧가루 한 컵을 건넨다. 금 한 돈 같다. 값을 매길 수 없으니 그냥 가져가라고 하신다. 감사하다고 하고 종이컵 윗부분을 다른 한 손으로 막고 뛴다. 좀 더 격하게 감동을 표현했어야 하나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가 없다.

드디어 즉석 겉절이 완성! 미리 만들지 않아 수분기 없는 쌈박함을 외국인 손님들이 좋아했으면 좋겠다. 고춧가루처럼 강렬한 포인트가 될 꽃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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