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철도재단'에서 진행하는 '남북/대륙/공공 철도 체험학교'에 응모했다. 8개월 동안 한 달에 두 번 철도 교육, 연구, 토론을 하고 철도 발자취를 돌아보는 일정이다. 주위에서 흘겨본다. 40세 이하를 우대하는 교육에 지원했으니 그럴만하다. 아내도 흔쾌히 허락했다.
"아예 집 안 들어와도 괜찮아"라는 뼈 있는 말을 건네긴 했지만 화장실 청소와 요리에 좀 더 집중하는 모습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지원서내용을 대강 추리면 이렇다.
"기관사 일 하고 있습니다. 철도 공부에 마음이 당깁니다. 애 돌보기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특별히 대우받을 생각 없습니다. 조화가 있는 곳에 경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화가 있는 곳에 경쟁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조지 스티븐슨이 한 말이다. 체험학교 여정을 총괄하는 박흥수 기관사가 곧잘 인용하는 문장이다. 전략과 전술로 접근했다.
"만으로 따지면 마흔셋"이라는 말도 했던 거 같다. 궁색하지만 이번만큼은 잡고 싶었다.
박흥수 기관사는 철도의 유재석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가 쓴 모든 책들과 칼럼을 읽었고 출연한 방송은 꼭 챙겨봤다. 유느님 하시는 일에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라는 말처럼 철도는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곳을 그리며 동경하는 마음을 없애고 약속된 시간을 만들었다. 나와 박흥수 기관사는 철도처럼 가까워졌다. 유재석이 동네 아저씨가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박흥수 기관사를 대장이라고 불렀다. 젊은 대원들을 이끌고 수풀을 헤치고 돌아다닐 때는 탐험대장, 골목골목을 누빌 때는 골목대장. 나는 양양에서 최북단 제진역까지 지금은 사라진 철도 흔적을 찾아 대장과 함께 나섰다.
"남한과 북한의 철길은 본래 하나였다."
일본은 한반도를 기점으로 중국을 통해 인도까지 진출할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철도를 건설했다. 경제적, 군사적 이유로 놓인 선로는 양양에서 동쪽 해안을 따라 바다를 품고 원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한때 군대 유격장에서 했던 가혹행위 '원산폭격'의 원산은 북한 함경남도 지방에 있는 폭격 맞은 항구도시 원산을 말한다. 원산에서 강원도 양양까지 놓인 동해선은 부산으로 더 뻗지 못하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단절된 채로 버려졌다. 갯내음 물씬 풍기는 동해안 곳곳에 방치된 교각과 터널에는 총탄의 상흔이 선명했다. 곳곳에 일본식 가옥은 시간이 지나 허물어지고 변형되었지만 옛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적산 가옥과 철도관사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옛 승강장 터에 남은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로는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DMZ을 앞에 두고 찾아간 제진역에서 열차는 남북 어디로도 오갈 수 없어 멈춰있었다.
"설렘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비운의 역."
철마는 달릴 수 없다. 남북 관계는 방도가 없어 암담하다. 철도가 얽힌 오해를 풀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철길은 서로를 이어준다. 자주 오가면 대립은 사라지고 믿음이 쌓여 서로 의지할 수 있게 된다.철도가 답이다. 공간을 살해한 철도에게 갈등도 없애주길 기대해 보는 건 어떨까. 우리 집에도 하나 들여놓고 싶을 정도로 철도는 여러모로 도움을 준다.
현재 새로운 동해선 공사가 한창이다. 부산에서 영덕, 강릉, 제진역을 지나 원산, 금강산, 나진역까지 한반도 종단 철도 완성을 앞두고 있다. 완공된 철길은 나진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결될 것이다. 남과 북이 협력하면 유럽까지 연결된 철도를 통해 평화, 문화, 경제 발전을 앞장서 이끌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울림 있는 그날이 올까. 둘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