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현관 번호키 누르는 소리. 곧이어 조심스레 열렸다가 천천히 닫히는 소리. 잠시 뒤 중문이 열리고 신발을 벗는 듯한 미세한 소리. 마지막으로 제 방문 여는 소리. 소리들이 청각이 아닌 시각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그렇게까지 조심할 필요 없는데 제 딴에도 새벽 귀가는 무척 조심스러운 모양이다. 지방 촬영에서 엿새 만에 귀가하는 막내는 늦은 밤 촬영 종료와 새벽 귀가를 가족들에게 미리 알려두었었다.
휴학 후 드라마 촬영 조명 팀의 막내로 일한 지 벌써 다섯 달이 지났다. 촬영 현장 특성상 하루 열다섯 시간 근무에 수시로 오버타임은 기본이다. 사극 촬영의 대부분이 야외 촬영인데 야외 세트장은 가까워야 용인이고 전북 부안이나 경북 문경 등 지방 촬영이 대부분이다. 거리만 문제가 아니다. 촬영장 조건상 추울 때 더 춥고 더울 때 더 더운 극한의 직업이 아닐 수 없다. 무거운 장비를 수시로 옮기고 팀의 허드렛일은 대부분 막내가 도맡아 하는 모양이다. 그만큼 이직이 많다 보니 보통은 회사와 직접 계약하지만 막내들만 특별히 회사 아닌 감독과 계약한다고 들었다. 힘 좀 쓰는 남자들이 하기에도 벅찬 부분이 많다 보니 현장에 여자 기사들이 그만큼 적은 것도 사실이다.
왜, 하필…….
지켜보는 부모로서 당연히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고 말리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하나를 안고 있는 기분이다.
첫 번째 폭탄.
고3 원서를 쓰기 한 달 전 갑자기 연극영화과로 지망학과를 바꿔 멘붕을 겪었다. 세 딸 중 유난히 자기주장이 강한 막내로 인해 적잖이 애를 태우던 아빠는 그 일로 몇 달간 아예 대화를 단절하기까지 했다. 갑자기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니, 그 뜬금없는 발표에 당황한 게 어찌 아빠뿐일까. 갑자기 바뀐 장래희망도 문제지만 몇 년씩 준비해도 어렵다는 예체능계 진학을 단 몇 개월 만에 해내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결국 ‘재수’ 없이 연극영화과 연출 전공으로 진학에 성공했다. 그것은 정말 운명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학기 중에 간간히 촬영 현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갔다. 그게 또 마침 조명 팀이었다. 원했던 연출팀은 구직이 쉽지 않은 대신 힘든 조명 팀엔 수시로 구인난이 올라왔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조명 팀과의 인연.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남녀 직업의 경계가 없다고 하지만 기운도 없고 철딱서니 없는, 천상 막내 기질 다분한 아이가 억센 남자들 틈에서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럼에도 말릴 수 없었다. 22년 간 겪어본 결과 말린다고 순순히 들을 아이가 아니다. 그야말로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찍어 먹어보고 판단하는 아이다.
두 번째 폭탄.
아빠의 소원은 막내가 빨리 졸업하고 제 갈 길을 가는 것이었다. 막내가 입학할 무렵 자신 사업체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고민이 많았다. 부모의 지원은 대학 졸업까지라고 못 박은 만큼 더 어려워지기 전에 빨리 졸업시키고 자식 뒷바라지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동상이몽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막내는 제 나름대로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다. 대학생활 2년 동안 선배들의 졸업 작품 스텝으로 일하면서 졸업 작품에는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아빠의 사업이 힘들게 된 것을 눈치챈 막내는 아빠가 학비까지는 감당해줘도 제 졸작까지는 책임질 수 없다고 느꼈나 보다.
휴학.
반대를 해봐도 소용없었다. 이미 마음을 굳힌 다음이었다. 휴학계를 내기 전에 조명팀 막내로 합류를 약속해둔 후였다. 그렇게 벌써 육 개월 차 조명팀 막내의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다.
세탁이 끝나고 빨래를 넌다. 빨랫줄에 걸려있는 빨래들이 온통 검은색과 무채색 계열이다.
스물두 살, 한창 멋 부리기 바쁘고 일부러 꾸미지 않아도 예쁜 나이. 내 눈에 꽃보다 더 예쁜 아이가 열악하기 짝이 없는 촬영 현장에서 그 고생을 하고 작업복만 입고 이리저리 허둥대며 뛰어다니는 꼴을 상상하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제가 선택한 제 일이고 어차피 도움을 못 줄 바엔 가만히 지켜보자 하면서도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미처 몰랐는데 조명이 마술 같아.”
한창 직업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는 막내가 일과 관련한 발언을 할 때마다 자라 본 가슴이 되어 깜짝깜짝 놀란다. 또 무슨 밑밥을 깔기 위해 하는 소리가 아닌지 지레 의심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 마냥 응원하고 지켜보기엔 살짝 미심쩍은 이 기분. 혈육이 아닌 주변의 어른 입장이라면 기특하다고 웃으며 응원해 줄 일 같지만 나는 엄마기에 이리 걱정하고 저리 염려하는 것이 아닌지. 아직은 내 그늘 아래서 보호받고 학창 시절을 즐겼으면 하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뜬구름 같은 생각일까. 어떤 선택을 하든 무조건 지지하지 못하는 건 딸이 아직 미덥지 못하고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햇살이 뜨겁다.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발코니에서 잠깐도 이토록 견딜 수 없을 만큼 더운데 막내는 하루 종일 뙤약볕과 조명의 열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을까.
검은 티셔츠에 하얗게 얼룩져 있던 것은 단순히 땀자국이 아닌 딸아이 꿈의 지도가 될 거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