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기

제주에 스미다


우린 드디어 제주로 떠나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여행 한 번 가자고 계획했지만 실행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황혼육아까지 빈틈없이 해내는 수필가 김에게는 그야말로 빈틈이 필요한 시기였다. 건강상의 문제로 의기소침해진 시인 박에겐 위로가 필요했다. 아동센터 강사 재계약이 불발된 수필가 조는 이 참에 적당한 쉼이 필요했다. 딸을 결혼시키고 독일로 보낸 후 허전함에 문득문득 우울감에 빠진 나는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필요했다. 각자 그런 사연과 이유로 일단은 떠나보기로 하고 급하게 비행기를 예약했다. 여행지는 제주, 넷 중에 제주여행 경험이 가장 많은 내가 자연스럽게 여행 계획과 가이드를 맡았다.

어쩌다 보니 제주 여행을 자주 했다. 그만큼 제주는 내게 가장 친숙하면서 인상 깊은 여행지다. 열 번이 넘는 여행 중에 세 번은 나 홀로 여행이었다. 회사에서 단체로 간 적도 있고 가족여행은 물론 형제간 여행, 친구들과의 우정 여행도 있었다. 그럼에도 가장 인상 깊고 만족스러웠던 여행은 단연 나 홀로 여행이었다. 제주뿐 아니라 다른 곳을 여행할 때도 나는 종종 나 홀로 여행을 선호한다. 나는 왜 그토록 나 홀로 있는 시간을 선호하는지 나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한다. 성격유형 중에 홀로 있을 때 에너지가 생긴다는 I유형이라 그런 걸까? 그렇다고 해서 동행이 있던 여행이 나빴던 적은 없다. 만족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일 뿐. 그런데 이번 여행은 나 홀로 여행만큼 기대되는 것이 있다.

우린 모두 글쟁이 들이다.

수필가 둘, 시인 하나, 소설가로 구성된 감성 터질 듯한 ‘네 여자의 감성여행’을 콘셉트로 여행 계획을 짜겠다고 공표하고 나니 에너지가 마구 샘솟는 기분이다. 지금까지 여행했던 장소들을 나열해보고 선택을 고민했다.

지금까지 역시 동행에 따라 여행 콘셉트를 달리했다. 회사의 단체 관광은 말 그대로 관광지 위주의 여행이었다. 제주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관광지를 두루두루 둘러보고 음식도 대표 메뉴로 내 취향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연로한 엄마를 모시고 했던 형제 여행은 내가 기획한 대로 편하게 둘러볼 수 있고 볼거리 많은 관광과 여행을 적당히 조합했었다.

가족과의 여행은 딸들의 취향을 고려했다. 딸들이 SNS로 검색해 알아낸 카페와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곳이 우선 선택되었다. 부부만의 여행은 한적하게 걸을 수 있는 풍경 좋은 곳이 우선 선택되었다.

나 홀로 여행은 그저 쉼과 자연에 동화되는 여행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숲이나 바닷가 산책을 하고 한적한 카페에서 책을 읽고 저녁엔 가볍게 술 한 잔을 하고 글을 썼다. 아침에 일어나 아무도 챙기지 않아도 되고 아무 약속도 없이 무계획으로 있다는 자체로 여행은 이미 충분히 충족되곤 했다. 이렇게 여러 유형의 여행을 하다 보니 그 여러 가지의 여행 중 이번 콘셉트에 맞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그리 어렵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조건 좋다는 김과, 따로 또 같이 하는 여행을 주문한 박, 같은 공간 다른 휴식을 제안한 조. 아, 이런 까다로운 고객들 같으니라고. 이번 여행 루트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내가 원하는 여행과 가장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박 3일이지만 새벽 비행기로 입도해 밤 비행기로 나오는 일정이라 3일을 꽉 채울 수 있었다. 숙소는 동쪽이지만 공항을 기준으로 서쪽부터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루트를 짰다. 첫 여행지는 시인 박이 추천한 아르떼 뮤지엄이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환상적인 미디어아트를 경험했다. 일행들은 그냥 관람만 하는 것으로 만족 못하는 호기심쟁이들이다. 뮤지엄에서 제공하는 종이와 크레파스를 이용해 아이들 틈에 끼어 각자 좋아하는 동물을 그렸다. 곧 우리가 그린 동물들이 사파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돌아다녔다. 기대만큼 색다른 체험이었다.

난대림의 울창한 숲길을 천천히 걸었다. 한참을 걷자 나타난 웅장한 천지연 폭포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폭포수 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서로 말을 아꼈다. 예술을 한다는 우리도 자연 앞에서는 그저 겸손한 인간일 뿐이란 걸 잘 아는 사람들이기에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침묵하게 되었다.

이중섭 미술관을 관람하고 매일 올레시장에서 장을 본 후 내가 제주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원 큰엉 해안 경승지로 안내했다. 그 해안절벽 위에 서서 서귀포 앞바다를 마주하고 서면 누군들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고 장담할 만큼 내가 사랑하는 곳이다. 이곳은 내가 올레 5길의 산책로를 따라 일부 구간을 함께 걸어 보길 강력 추천하는 곳이기도 하다. 숙소 입소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간 곳이라 많은 시간 감상할 수 없음이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여행자들에게 숙소는 까다롭게 선택하는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호텔처럼 편안한 숙소 대신 게스트 하우스의 도미토리 룸을 예약한 것은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일행들의 호기심 충족을 위해서였다. 나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 룸 2층 침대도 익숙하지만 다른 일행들은 첫 경험이라 그런 잠자리조차 설레며 기대하고 있었다. 마침 성산에는 친분 있는 작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어 그곳을 예약해 둔 터였다. 수필가와 평론가로 활동하는 작가 이명진 선생님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여행 둘째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숙소를 나서는데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속으로 쾌재를 불었다. 여행 중에 비를 기다리는 여행자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중산책이 제격인 비자림 천년의 숲이 행선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개인적으로 비자림 숲을 여러 번 다녀봤다. 그중에 가장 좋았던 때는 비 오는 날이었다. 비가 와서 줄어든 탐방객들로 숲길은 한적하고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걷는 맛은 밝은 날 걷는 것보다 만족도가 훨씬 높았다. 나는 바로 그 느낌을 일행들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 의도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역시 이 감성쟁이 들과 오랜 세월 무리 없이 관계를 이어온 것은 이런 감성의 공통점이 통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숲에서 우린 반드시 함께 걷지 않아도 되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각자 걷고 새천년 비자나무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함께하는 여행 중에 오롯이 혼자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다들 만족스러워했다.

종달리의 작은 책방에도 들렀다. 작가들 여행이라서 티 내 보자는 의도가 아니라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여행지에서 책 한 권 사보는 낭만을 즐겨보자 했더니 다들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 들른 책방에서 박은 일행들에게 책을 한 권씩 선물했다. 감동은 자꾸 더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연배가 제일 위인 김의 따님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해준 것에 감사하다며 여행 내내 점심을 책임져주었다.

뷰가 멋진 해안가 카페에서 우린 다시 각자가 되었다. 글 작가면서 그림이 취미인 조는 그림을 그리고, 김은 일기를 쓰고, 박은 산책을 나갔고, 나는 책을 읽었다. 그렇게 둘째 날의 일정을 끝낸 저녁 게스트하우스와 함께 운영하는 이명진 작가의 북 카페서 주인과 객 따로 없이 와인을 마시며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첫날 첫 여행지처럼 마지막 날 첫 여행지 역시 미디어 아트인 빛의 벙커 뮤지엄이었다. 제주의 서쪽에 아르떼 뮤지엄이 있으면 동쪽에는 빛의 벙커가 있다. 뮤지엄의 이름처럼 벙커로 입장하는 입구에 아침의 빛이 눈부시게 빛났다. 또 다른 미디어아트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핫한 여행지로 혼잡한 곳이란 걸 알기에 개관시간에 맞춰 입장했다. 사방에서 움직이는 명화를 가장 잘 감상하기 위해 방법을 찾다가 어느새 다들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예술을 감상하는 건 형식이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해외의 유명 미술관에 걸려있을 명화를 미디어 아트로 전시장 전체를 활용해 보여주는 것처럼 관람하는 자세나 행위 자체가 반드시 근사할 필요는 없다. 예술을 향유하는 그 자체로 이미 만족스러웠다. 지중해로의 여행이라는 주제로 모네, 르누아르 등의 인상주의와 모더니즘 화가들의 작품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관람하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4.3 평화공원에 들러 제주의 아픈 역사를 알고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다. 두 번째인 박은 끝까지 관람하지 못하고 중간에 나왔다고 했다. 공감력이 뛰어난 데다 가슴이 아파서 도저히 끝까지 볼 수 없었노라 했다. 모두의 마음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여행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할까. 특히 육지 사람들의 제주 여행은 일정의 책임감이 따르는 여행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겁고 아픈 마음을 추스르고 나와 늦은 점심으로 제주 식 콩국을 먹었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먹는 즐거움. 이번 여행에서 새로운 제주 토속음식으로 처음 맛보았던 콩요리였는데 만족도 최상이었다.

추천받은 근사한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이호테우 해변에서 여행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산책을 했다.

어느 곳을 여행하든 그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여행을 선호한다. 이번 제주여행 역시 그랬다. 어쩌면 기대 이상의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그건 아마도 일행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이 통하는 오랜 인연들과 떠났던 제주여행은 온전히 스며든 여행이었다. 제주에도 사람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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