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 한마디

그녀의 입속에 태풍이 숨어있다

그녀의 입속에 태풍이 숨어있었다.

태풍 ‘힌남노’의 영향인지 창밖으로 보이는 뒷산 나무들의 흔들림이 심상치 않았다. 새벽부터 아파트 앞 텃밭에는 도시농부 몇 사람이 나와 부지런히 채비 중이었다.

토요일이지만 여전히 이른 출근을 서두르는 남편을 따라나섰다. 며칠 전부터 김장배추를 심으려고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나는 김장배추 모종을 사들고 다니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오늘은 작정하고 배추도 심고 태풍 오기 전에 텃밭 정리 좀 해야지 싶었다.

회사 건물 옆, 세로로 긴 서너 평 빈 터에 소꿉놀이하듯 농사놀이를 한 지 벌써 10여 년이다. 농사라고 해봐야 상추 같은 쌈 채소 몇 가지 길러 먹고 토마토 몇 그루 심어 오가며 입맛 다시는 정도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고추는 화분에 몇 그루 따로 심어 해 잘 드는 뒤꼍에 두고 가을까지 양념으로 쓰고 주변에 나눔도 더러 한다. 먹을거리뿐 아니라 작년에 이어 밭 가장자리에는 봉숭아를 심었다.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일 것도 아니면서 아직 내 마음속에 그런 낭만이 있는 탓인지 그저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고 좋았다. 농사에 욕심이 있다면 좁은 밭에 그늘 드리워지는 게 더 걱정일 텐데도 태평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울타리 쪽으로 작약, 매발톱, 으아리, 초롱꽃 등도 심었다. 공장 주인이 한 번씩 와서 참견하고 돌본다는 명분 하에 잡초로 알고 무분별하게 뽑아버려 몇 번 속상한 적은 있지만 그런대로 농사 놀이와 정원 놀이를 잘 즐기고 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굳이 그런 의미로 따지지 않아도 올해 텃밭농사는 폭삭 망했다. 애들 말로 ‘폭망’이다. 여름 한 달을 독일에 사는 딸에게 가 있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데다 긴 장마와 유난히 잦았던 큰 비에 채소들은 다 녹아버렸고 고추는 탄저병을 이기지 못했다. 그나마 요즘 흐뭇한 것은 부추다. 아직 가늘긴 하지만 씨를 뿌린 자리마다 기세 좋게 올라왔을 뿐 아니라 부쩍부쩍 자라는 게 마냥 신기할 정도다. 자라는 속도도 빨라서 잘라내고 며칠 지나면 또 부쩍 올라와있어 더욱 놀랍다.

몇 개 남지 않은 고추를 따고 풀을 좀 뽑은 후 부추를 자르고 있었다. 또 며칠 비가 온다니 부추전을 해 먹을 요량이었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 부추를 자르고 있던 그때 비질 소리가 들렸다. 건너 공장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으니 소리의 진원지는 분명 앞집이다.

여긴 공장 지대라 민가가 아예 없다. 그런데 독특하게 우리와 담장을 함께 나누어 쓰는 담장 아래에 조립식 주택이긴 하지만 분명 민가가 있다. 터도 꽤 넓어 여러 가지 과실수도 심고 꽃도 더러 가꾸어 놓았다. 대문 앞에는 위협적이긴커녕 귀엽기만 한 강아지 두 마리도 매어놓고 키운다. 지날 때마다 이웃 하나 없는 곳에 집을 지은 사연이 궁금했다. 그렇게 몇 년을 궁금해하던 나의 궁금증을 풀어준 것은 그 집에 사는 안주인이었다.

2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추를 따다가 서성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좀 드셔 보실래요? 약을 치지 않아 안심하고 드셔도 돼요”

내가 먼저 말을 건넸고 그녀가 흔쾌히 그러마 했다.

그 후에 또 한 번 마주쳐 고추도 몇 개 따서 건네주었다. 관심이 있다면 얼마든지 소일 삼아 텃밭농사 정도 가능할 터가 충분했지만 울타리 사이로 들여다본 그 집에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으니 나도 선뜻 권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몇 마디 주고받으며 알게 되었다. 앞집의 주인은 앞 블록 전체의 땅은 물론 거기 세워진 건물들의 주인이다. 그렇다 보니 관리의 필요성이 있어 강남에서 출퇴근하느니 그 땅에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주로 남편이 거주하고 자신은 한 번씩 들르는 정도라고 했다. 한마디로 말로만 듣던 강남 부호였다

그 후로 한 번 더 그녀와 마주쳤다. 그 해에 그 집 두 그루의 단감나무에 감이 유난히 많이 열렸다. 그녀가 직접 딴 단감 몇 개를 건네주었다. 단감은 보기보다 맛이 좋았다. 그 후로 영 그녀를 보지 못했다.

비질 소리에 불현듯 그녀가 떠올랐고 예상이 들어맞았다. 나는 반가워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울타리 가까이로 다가가 반갑게 인사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표정이 묘하다. 인사를 받는 것 같지는 않고 내 인사가 오히려 의아한 표정이다.

“한참 안 보이셔서 궁금했는데 오랜만에 뵙네요.”

마주 오는 대답 없는 그녀를 향해 또다시 인사말을 건넸다. 이번에도 인사는 없다. 그러면서 인사 대신 굳이 내가 들으라는 건지 혼잣말처럼 한마디 한다.

“나를 언제 봤다고...”

당황한 내가 잘못 봤나 싶은 생각에 얼른 변명처럼 되물었다.

“혹시 여기 사시는 분 아니세요?”

“맞아요.”

“저랑 인사도 나누고 하셨는데...”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아, 고추 주고 했던?”

“네 맞아요.”

“까먹었어요.”

그것으로 끝.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대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난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대문을 쳐다보았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무안하고 누가 봤을까 얼른 주변을 살펴보았다. 뭐가 잘못됐을까? 내 인사말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소심한 나는 내게서 문제점을 찾고 있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그 옛날 천 냥은 엄청난 값어치였을 것이다. 그저 돈 안 들고 힘 안 드는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대신 갚아준다니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그만큼 강조한 것일 터이다.

그런가 하면 말 한마디로 살인도 하는 세상이다. 눈을 곱게 뜨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투가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시비가 붙고 큰 싸움으로 번져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사건을 심심치 않게 접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말 한마디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상태에 따라 태풍처럼 거세고 거칠게 반응한다.

그녀는 오늘 내게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녀와의 짧은 마주침 후 내 마음속은 마치 큰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헤쳐지고 어지럽혀졌다.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맑아 보이지만 태풍을 품고 있으니 그 거친 속내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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