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잘 사 주는 예쁜 언니

팬티 잘 사 주는 예쁜 언니

내겐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 말고 ‘팬티 잘 사 주는 예쁜 남의 언니’가 있다.

나는 벌써 여러 해를 거쳐 명절 때마다 남의 언니에게서 팬티를 선물 받고 있다.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한 하 수상한 시절이다. 며칠간의 한파가 잠시 물러가고 쌓였던 눈이 녹는 틈을 타 서로에게 전해줄 책이 있어 잠깐 만났다. 만남의 장소라는 것이 기껏 언니 동네의 대로변이었고 일정이 있어 차량으로 이동하는 10여분의 시간이 만남의 전부였다. 헤어지며 언니가 건네준 쇼핑백 안에는 척 보면 내용물을 알 수 있는 속옷회사 로고의 포장된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혜영 씨 빤스 하나 샀어. 맞으려나 모르겠다.”

예상은 역시나 빗나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설이 멀지 않았다. 언니는 또 언니의 ‘할 짓’을 기꺼이 내게 하고 있다. 친언니가 다섯이나 있지만 사실 언니들에게는 받아보지 못한 선물이다. 타인에게 속옷 선물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망설여지게 마련이다. 개개인의 취향이나 사이즈 등 거기다가 속에 입는 것이니 선물을 한 사람 입장에서도 받은 사람이 그걸 실제 착용을 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자고로 선물을 하면 그 받은 이가 그걸 기쁘게 사용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욕구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 나 자신도 남에게 속옷을 선물해 본 적은 없지 싶다.

나는 지금까지 이 분에게 수년 동안 명절 때마다 팬티와 양말을 선물 받았고 그때마다 감사히 입고, 신고 있다. 역시 연륜이 있다 보니 내가 고른 속옷보다 편하고 내가 사는 양말보다 더 품질도 좋아 매일 신고 있다. 또 하나 특별히 팬티의 색깔이 붉은 계열인 것은 붉은색이 복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였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언니의 선물이 모두 팬티와 양말만이 아니다. 손꼽아 보면 나는 언니로부터 참 많은 선물을 받았다.

좁은 집에서 살다 넓은 집으로 이사했을 때는 손님 많은 집이 잘 산다면서 다인용 그릇세트를 사주셨다. 그릇세트가 들어있는 커다란 박스를 붙잡고 한참을 멍청히 앉아 있었다. 살면서 이사 선물로 타인에게 그런 큰 선물을 받는다는 게 낯설면서 설렜다. 본인도 막내면서 늘 친정동생 대하듯 하더니 정말 친정언니처럼 살뜰한 면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 그릇으로 정말 많은 손님을 치르며 살았다. 그 집에 살면서 2년 만에 내 집을 장만했다. 대부분이 그렇듯 물론 은행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계획보다 빠른 진전이었다. 언니 말처럼 그야말로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의 내 집에 입주하면서는 큼지막하고 예쁜 항아리를 선물해주셨다. 주둥이가 넓은 것은 그 입구로 복이 들어오는데 거침이 없을 것이고 그 넓은 품만큼 금은보화가 넘치고 그 독에선 퍼내도 퍼내도 쌀이 넘쳐나라는 의미라고 일러주셨다.

그렇게 언니는 내게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언제나 덕담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그 기쁨을 떠올리게 하는 선물을 함께 하셨다. 여러 번에 걸쳐 각기 다른 부부 찻잔을 받아 차를 마시고 자신이 아끼던 액세서리도 하나씩 주셔서 내 밋밋한 의상에 날개를 달아주기도 했다. 남편의 사업이 힘든 걸 아시고 같이 장을 보자며 불러선 과일이나 식료품을 여유 있게 사서 나눠주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가 그것들을 넙죽 받을 수 있는 것은 거절하지 않는 것이 언니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만약 언니가 나를 동정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 많은 선물은 고사하고 양말 한 짝이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언니가 부자라서, 남들보다 여유가 많아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돌아보면 언니에게 정말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야말로 염치없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나잇값 못하고 여태 받기만 했지만 지금까지 받은 것 중 가장 큰 것은 사실 언니처럼 살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흉내를 낼 줄도 알게 되었다.

내가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성의를 가지고 베푼다는 것은 사실은 마음의 문제였던 것이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양말 한 짝도 선뜻 마음내기 힘든 게 인간관계다. 선물을 하되 상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모범답안이 내겐 언니였다. 팬티를 할 때 특별히 붉은 계열인 이유를 귀띔해준 덕에 나는 그걸 입을 때마다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많은 손님을 접대하면서 간혹 힘이 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내 집에 찾아오니 나는 잘 살고 있구나 안도했다.

큰 독에서 쌀을 퍼낼 때마다 그분의 마음이 떠올라 흡족했다. 변변한 입성이 없을 때 그분의 액세서리 하나가 그나마 초라함을 비껴가게 해 줬다.

선물의 진정한 의미를 그분에게 배우고 있다. 선물 자체보다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무리 값비싼 선물이라도 그것이 가치를 발휘하려면 진심으로 그 사람을 위한 마음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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