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야구광이 되는구나

이렇게 야구광이 되는구나.


막내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나와 같이 프로야구 직관을 하자는데 나는 야구에 관해 전혀 알지도 못하거니와 관심 밖의 영역이었다. 막내는 농구 시즌이 끝나자 바로 프로야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올 초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슬램덩크> 영향이다. 영화가 개봉되고 나자 관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려 열다섯 차례나 상영관을 찾았다. 일반 상영관은 물론 집 가까운 곳은 물론 서울, 수원까지 원정 관람도 불사했다. 한 작품에 대해 그토록 지극한 정성이라니 도대체 이해불가한 일이었다. MZ세대의 사고려니 짐작할 뿐 그 열정이 그다지 공감 가지도 않았다. 의아해하는 가족들에게 막내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볼 때마다 새로운 게 보이고 감정이 다르고 상영관에 따라서도 다르다고. 우린 막내가 연극영화과 전공생이니 일반인과는 확실히 다른 시야를 가져서이려니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영화와 함께 막내는 농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슬램덩크 속 강백호를 현실 농구팀에서 찾기라도 하려는 듯 보였다. 지역 소속구단의 팬이 되어 홈팀 경기는 물론 원정 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단순히 응원만 하는 게 아니라 티켓 구매와 유니폼 응원도구 등을 구입하기 위해 제 용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세 딸을 키우면서 지금껏 보지 못한 막내의 행보가 낯설면서 한편으로 호기심이 생겼다. 무엇이 저 아일 저토록 열정 가득하게 만들었을까.

막내는 확실히 제 언니들과 다르다. 겨우 3년씩 터울이지만 그 사이 간극은 그 보다 훨씬 넓고 깊다. 셋 다 흔히 말하는 MZ세대가 맞지만 유독 막내에게서 그 세대의 특이점을 실감한다. 그렇게 몇 개월간 농구 영화와 경기에 미쳐있더니 두 가지 다 막을 내리자 바로 야구로 갈아탄 모양이다.

막내가 응원하는 팀은 서울 잠실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둔 두산 베어스 팀이다. 막내는 그동안 상대팀 구장으로 원정 응원도 몇 번 다녀왔다. 팀이 승리하는 날은 자신이 승리한 것 마냥 좋아했고 패한 날은 그만큼 침울했다. 가족들은 막내의 그런 모습이 그저 신기했다. 그런 막내가 식구들 중 내게 야구장 데이트를 신청했으니 나는 처음 있는 일에 마냥 설레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막내는 관람 며칠 전 내 유니폼까지 구했다. 하얀색 유니폼에는 64번 최승용 선수가 새겨져 있었고 그 외의 광고문구가 유니폼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굳이 유니폼까지 갖춰 입어야 할까 의문이었지만 최대한 막내의 계획에 따라주는 게 예의였다.

드디어 직관일이다.

다른 일정이 있어 경기 시작 전 경기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차마 입고 가기 뭐해서 가방에 가지고 간 유니폼을 경기장 앞에서 갈아입었다. 그 앞의 대부분 팬들이 유니폼을 입고 있어 그제야 막내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고 비로소 팬의 입장에서 그런 형식이 불필요한 허세가 아니라 그만큼 열정을 보여주는 일임을 저절로 느끼게 되었다.

야구 경기장은 처음이었고 놀라움 자체였다. 우린 야구장 국룰이라 일컬어지는 맥주와 치킨도 샀다. 자리를 찾아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했다. 나는 야구에 대해서도 선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지만 바로 야구팬이 된 기분으로 응원을 따라 했다. 선수마다 응원가가 따로 있는 걸 그때 처음 알았지만 한두 번 따라 부르니 금방 외워 따라 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팀의 응원구호도 어렵지 않게 따라 할 수 있었다. 우리 자리는 응원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응원석의 열기는 경기 내내 실로 대단했다. 응원단장의 호각과 구호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구호를 외치고 응원가를 부르고 경기 내내 앉지도 앉고 서서 응원했다. 치어리더들도 율동으로 흥을 돋웠다. 우리도 그에 못지않았지만 기왕에 할 거면 응원석에서 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길 만큼 응원의 열기가 내게도 전달되었다.

대각선에 자리한 상대 원정팀의 응원 열기도 홈팀 못지않았다. 알려주지 않아도 직관의 묘미가 바로 응원전이란 걸 그렇게 저절로 알게 됐다. 우리 앞줄에는 상대팀 팬이 있었는데 그녀는 아주 작은 동작으로 내내 본인 팀의 응원가를 따라 하고 구호를 읊조리고 있었다. 홈팀 두산 팬인 친구와 온 듯한데 그야말로 적진에서 장수 혼자 싸우는 격이다. 보는 내내 내가 괜히 신경 쓰였다. 우리가 목청껏 외칠 때마다 그녀는 혼자 반응하지 않았고 대각선 건너 자기 팀 구호와 율동을 따라 했다. 그렇지만 목청껏 외치지 못하는 소리는 작고 율동은 겨우 흉내 낼만큼 작고 소심했다. 소리 죽여하는 그 속이 얼마나 답답할까. 차라리 자기 팀에서 관람하면 나처럼 맘껏 신나게 할 수 있을 텐데 내 속이 다 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경기는 결국 승패가 있는 법, 우리 팀은 10대 0의 승리를 거두었다. 첫 직관에 열렬한 응원으로 스트레스 날린 것만 해도 만족스러운데 승리라니 얼마나 기분 좋은 결말인가. 9회 초 상대팀의 공격에서 득점이 나지 않자 9회 말 우리 팀 공격은 하지 않고 그대로 경기는 끝났다.

그리고 그 9회 말 마지막 투수가 바로 내 유니폼의 주인공 최승룡 선수였다. 전광판에 최 선수가 올라오자 그때 나는 마치 내가 키운 아들처럼 자랑스러운 감정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이게 바로 팬심이구나. 이 나이 되도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날 경기장에서 본 팬의 성비로 볼 때 월등히 많은 20대 여성들을 보면서 비로소 막내의 하는 짓들이 유난스럽고 특별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알아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망설임 없이 열정을 쏟는 그녀들이 아름다웠다. 경기가 끝나고 막내의 안내를 받으며 광역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내가 꽤나 만족스러워하자 막내도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이 나이에 새로운 경험이란 마냥 신나기보다 주춤거리고 망설여지기 십상인데 거침없이 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 준 막내 덕분에 나는 또 한 번 내 안의 열정을 확인했다. 경험이 그만큼 중요하다. 이 나이에도 그런데 젊은 딸에게 그건 얼마나 더 큰 경험이 될까. 한 영화를 열다섯 번씩 볼 때나 그 영향으로 농구와 야구 등의 스포츠에 열광할 때 이해하기 힘들었다. 평상시 입지도 못하는 유니폼을 꽤나 비싼 가격에 구입하는 일도 못 마땅했고 이런저런 응원도구에 굿즈를 사는 일도 이해불가였다. 그렇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막내의 상태를 한 번의 직관으로 이해가 됐다면 과장일까.

아무래도 난 다시 야구장에 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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