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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Nov 21. 2024

기쁠 땐 서점으로, 슬플 땐 책방으로

동네 책방의 다정한 위로

속초는 자연이 좋은 곳이라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면 마땅히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지금의 남편과 속초에서 연애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태풍이 오거나 한파 속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대형 쇼핑몰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 속초는 비록 복합 쇼핑센터는 없을지언정 훌륭한 독립 서점을 다수 보유한 '서점의 도시'였다. 속초에 수준 있는 동네 책방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우리의 만남 장소는 자주 서점이 되었다.


꼭 그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심심할 때, 약속 시간을 기다리는 데 애매하게 시간이 비었을 때, 크고 작은 일로 속상했을 때에도 책방은 모든 나를 푸근하게 감싸 안아주던 공간이었다.

  



1. 3대째 이어오는 백 년 가게 <동아서점>



속초에서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서점은 <동아서점>이다. 속초를 떠나온 지금도 여행 갈 때마다 잊지 않고 들르고 있다. 동아서점은 사장님이 손글씨로 직접 쓰신 책 소개나 방문객들이 남긴 메모가 전시되어 있어 잠시만 머물러도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출판사에 다니는 문예부 선배가 속초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언니는 동네 서점들이 살아야 한다며 기내용 캐리어를 가져와 세 곳의 책방을 돌며 가방 가득 책을 구입해서 돌아가셨다. 그야말로 '속초 책방 기행'을 온 것이다.

언니는 <동아서점> 사장님이 쓴 '당신에게 말을 걸다: 속초 동아서점 이야기'라는 책을 내게 선물했는데, 안에는 나의 이름과 함께 작가의 친필 싸인이 들어가 있었다. 그 선물이 참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 후 속초를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사장님의 싸인을 담은 '속초 동아서점 이야기'를 선물하기도 했었다.


책을 계산할 때면 책갈피나 스티커 등을 주시기도 하는데, 한 번은 직접 말리고 코딩했다며 붉은 단풍이 들어간 귀한 책갈피를 주신 적이 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선물이어서 더 뜻깊었던 것 같다.


서점에서는 종종 작가의 강연회, 북토크 등이 열렸다. 남편과 사귀기 전 첫 데이트도 바로 <동아서점>에서였다. EBS 프로그램 촬영으로 김훈 작가님과 백영옥 소설가의 대담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작가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들어갔다.



2. 트렌디한 로컬 서점 <문우당>


<동아서점>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문우당>은 ‘글월 문’, ‘벗 우’, ‘집 당’으로 이름을 짓고 ‘책과 사람의 공간’이란 철학을 가지고 지역과 공존하고 있는 서점이다. 독립출판물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것은 물론 독서모임을 위해 장소를 무료 대관하는 등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내가 속한 독서모임도 <문우당>에서 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글쓰기를 위한 강연과 독서모임에서 주최한 강연도 이곳에서 열려 방문할 기회가 꽤 여러 번이었다. 특히 <문우당>은 2층으로 올라가는 벽면 전체를 책 속의 글귀들로 장식해 놓아 포토 스팟으로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3. 서점 겸 카페 그리고 북스테이 <완벽한 날들>


서점 <완벽한 날들>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의 책에서 이름을 따왔다. 위치가 속초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 있어 여행객들 사이에 특히 인기가 높고, 북스테이도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다.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하는 곳으로 책을 매개로 한 모임과 세미나,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1년간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었다. 책과 글쓰기, 자연을 사랑하는 좋은 분들을 만나 문학적인 교류도 하고 속초에 대한 정보도 나누며 지금까지 연락을 이어오고 있다. '책'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서로 마음을 열고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4. 영원하길 바라는 귀한 곳 <바라타리아>



<바라타리아>는 속초는 아니지만 꼭 소개하고 싶은 독립 서점이다. 춘천 근화동 골목길 깊은 곳에 자리한 <바라타리아>는 '미미 책'이라는 특별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은퇴를 하고 책방을 차린 사장님 내외는 책을 통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래로 보내는 미리 계산한 책'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이디어의 시작은 임경선 작가의 ‘어디까지나 개인적인’에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 이야기였다. 하루키가 어린 시절 책을 보고 싶을 때마다 그냥 가져올 수 있는 동네서점이 있었다고 한다. 아들이 책을 보고 싶어 하면 그냥 내어달라고, 책값은 주기적으로 자신이 치르겠다고 서점 주인에게 아버지가 미리 부탁을 해둔 것이다. 하루키가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서점에서 어른들이 청소년에게 보낼 책을 골라 결제를 하면 ‘미미책’이 서가에 놓이게 된다. 이때 학생들에게 보내는 짧은 메모를 함께 적을 수 있다. 그러면 책방을 방문한 청소년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책을 골라 갈 수 있는 것이다.


한 번은 춘천에서 오래 머물 기회가 생겨 <바라타리아>에 자주 들러 글도 쓰고 책을 읽곤 했다. 미미책도 한 권 골라 서가에 두고 나왔다. 며칠 뒤 사장님께 춘천 소재 학교에 다니는 여중생이 내가 선물한 책을 받아갔다는 문자를 받았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나를 더 사랑해 주기 위해서'라고 학생이 남긴 메모도 함께였다.

별 일 아니지만 마음이 참 포근해지는 하루였다.


<바라타리아>와 관련된 잊지 못할 추억이 또 있다. 함박눈 내리는 날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차 유리에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급한 나머지 손으로 털어내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나오시더니 차 위에 내린 눈들을 다 털어주셨다. 덕분에 안전하고 편안하게 운전해 돌아올 수 있었다.


이토록 온정이 넘치는 책방이라니.

서점에서 마신 따뜻한 차와 책이 주는 안락함 무엇보다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 다정해서 더 소중한 춘천의 <바라타리아>였다.  



사람을 평가할 땐 그가 얼마나 자주 쓰러졌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일어섰느냐를 봐야 한다.

- 조셉 바이든 시니어. 미국 46대 대통령 당선자 조 바이든 父의 말 -

전에 <동아서점>에서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자주 쓰러지는 편이었다. 아슬아슬 외줄을 타는 인생인가도 싶었다. 자꾸 넘어졌지만 넘어진 만큼 다시 일어났다. 어떤 날은 삶의 의지를 모두 잃고 식음을 전폐한 채 누워만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니 그 시간들도 전부 아깝고 소중했다. 툭툭 털고 일어나 밥을 먹었고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들을 했다.

그렇게 암과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이제 '암'이라면 지긋지긋하고 징그럽지만 그와 함께한 날들도 분명 내 삶의 일부였다.


어떤 아이들은 슬프거나 숨고 싶을 때 책상 밑, 옷장 안 그리고 다락방 같은 곳을 찾는다고 한다. 나는 속상함에 마음이 무너질 때 책방으로 달려갔다. 기쁜 날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도 서점으로 향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고르기 위해, 밖에 있기 싫은 날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아서, 종이냄새가 그리울 때에도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면 동네 책방들이 건네는 다정하고 따뜻한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사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다가 와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차의 소음도, 사람들이 말소리도, 도시의 분주함도 그곳에는 없었다.


내년에는 남편의 직장을 따라서 강릉으로의 이주를 계획하고 있다. 솔향 가득한 강릉에서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닮은 책과 서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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