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발행했던 첫 글이 메인에 오르면서 구독자도 늘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분들께 응원도 받았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내내 혼자만 글을 쓰다가 이렇게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적나라하게 공개한 것은 처음인지라, 과장을 조금 보태 속옷만 입고거리를 활보하는느낌이었다.사람들이 수군대며 손가락질할 것 같았는데, 따뜻한 옷을 가져와 입혀주고, 몸을 녹이라며 차를 권했다. 이 글을 연재하는 두 달여의 시간 동안 딱 그런 느낌이었다.
꾸준히 습작을 하면서도 투병기나 항암일기는 쓰고 싶지 않았다. 뭐든지 적고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자주 오래 해서 그런지 그 글에 들어가야 하는 단어들만 봐도 벌써 속이 메슥거리고 코 끝이 아려왔다.
항암제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특유의 냄새가 있는데, 나는 그 냄새가 너무 싫어서 코 밑에 향수를 찍어 바르고 주사를 맞곤 했다.약의 대표적인부작용은속 쓰림, 울렁거림, 소화불량, 구토등으로 실제 많은 환자들이 병원 간판만 봐도검정 비닐봉지를 찾곤 한다. 병원을 떠올리게 만드는 주사, 알코올 냄새, 항암제의 종류와 부작용들을 내 손으로 반복해서 열거할 용기가 없었다.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 나는 느낌이랄까.
병을 앓으면서 다른 분들이아픈 몸을 살며 쓴 책들을 찾아 읽었다. 비슷한 시련이 왔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뎠는지 알고 싶었다. 사연이 없는 인생은 없다고 그들이 느꼈을 상황이나 감정에 몰입되어같이 울기도 하고, 마음이 무너지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철학자 김진영님이 쓴 <아침의 피아노>와 <이별의 푸가>라는 책이었다. 암 선고를 받은 철학자가 임종 직전 섬망이 오기 3일 전까지 병상에서 쓴 이별 일기로 담담하고 간결해서 더 슬펐다.
작고 동그란 몸. 늘 웃음을 담고 있다가 아무 때나 홍소를 터트려서 무거운 세상을 해맑게 깨트리는 웃음. 항아리 같은 몸. 나는 이 잘 웃는 여자를 떠날 수 있을까.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中
좋은 글을 오래도록 쓰고 싶은데, 그러려면 한 번은 내가 겪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가야 할 것 같았다. 외면한다고 없던 일이 되지 않았고, 모른 척하고 살기에는 암과 함께 살아온 시간들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최대한 관망하는 자세로 슬픔에 함몰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꼭병과 싸우고 있지 않더라도 인생의 힘든 시기를 보내는 분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면 좋겠다.나에게 힘을 준 많은 것들처럼 말이다.
내가 치병생활을 했던 속초에는 '엉덩이 빵'으로 유명한 베이커리가 있다. 사장님 자녀분의 이름인지 '원준이 엉덩이 빵'이 정식 명칭이다. 찐빵같이 동그란 외형에 말랑한 식감과 우유크림이 들어있어 가끔 기분전환도 할 겸 사 먹곤 했었다.
빵집을 나와 중앙시장 쪽으로 향한다. 조금 걷다 보면 고물상이 나오고벽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중 일부다.
삶은 결국 바람과 같다.
어루만지 듯 살랑거리다가 때로는 폭풍처럼 몰아치고 결국은 잦아들어 소멸한다.
도종환 시인은 바람이 왔다 가는 것처럼 그리움, 아픔, 세월도 그렇게 왔다 간다고 노래했고 (詩'바람이 오면'), 시인 박재삼은 천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 그리고 가난한 우리 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불던 바람이 결국 똑같다고 말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차피 이 테두리와 같다고. (詩 '바람의 내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