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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Nov 20. 2024

산과 바다와 호수와 시(詩)

힘이 되어준 글

속초로 내려와 가장 먼저 한 일은 강원도 출신 작가들의 책을 찾아보는 일이었다. 이때 발견한 두 사람이 고성 출신의 '이성선' 시인과 홍천이 고향인 '허림' 시인이다.

자연이 좋은 곳에서 태어난 두 시인의 글은 강원의 푸른 산과 맑은 물, 하늘의 별, 계절의 아름다움, 정겨운 시골의 정취를 노래한 시들이 많았다.


특히 이성선 시인의 시 중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바라보면 지상에서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늘 하늘빛에 젖어서 허공에 팔을 들고
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준다.
땅속 깊이 발을 묻고 하늘 구석을 쓸고 있다.
머리엔 바람을 이고 별을 이고
악기가 되어온다.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듯
나무도 나를 바라보고 아름다워할까
나이 먹을수록 가슴에 깊은 영혼의 강물이 빛나
머리가 숙여질까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혼자 있어도 놀이 찾아와 빛내주고
새들이 품속을 드나들며 집을 짓고
영원의 길을 놓는다.
바람이 와서 별이 와서 함께 밤을 지샌다.

- 이성선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을 나무에 비유한 그의 시처럼 나도 가끔 '나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땅 속 깊숙이 뿌리내리고 하늘 향해 똑바로 자라는 나무. 튼튼한 가지와 무성한 잎사귀로 작은 동물들의 집도 되어주고, 잠시 기대어 쉴 수 있는 넉넉한 품을 내어주는 나무.


하지만 언제나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특수한 상황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었다.

군데군데 박힌 굳은살로 뒤틀리고 꺾였지만 나름대로의 멋을 가진 옹이 진 나무,

바위틈에 뿌리를 내려 위태롭게 서 있지만 잎이 푸르고 무성해서 기특한 마음이 드는 나무,

벼락을 맞아 반쪽만 남았어도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영원불변의 모습이 된 나무...

예쁘고 올곧은 나무보다 그런 나무들에 더 시선이 갔다.


그들을 만날 때면 나는 언제나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무 앞에 섰다. 그리고 조심히 손을 내밀어 나무를 쓰다듬었다.

"고생했다. 힘들. 너는 꼭 나 같다..."

나는 나무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본다.


평탄하고 쉬운 삶은 아니었다. 구불거리고 굴곡 많은 세월이었다. 그래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더 단단히 뿌리내리려고 애썼다. 못 생겨도, 남들과 다른 삶이어도 살아내고 싶었다.

오랜 세월을 지나 내가 견딘 상처들은 옹이가 되어 굳은살처럼 박혔다. 그래서 나는 옹이 진 나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안아준다.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혼자 있어도 노을이 찾아와 빛내주고, 새들이 품속을 드나들며 집을 짓고, 바람과 별이 와서 함께 밤을 지새운다는 나무처럼 외롭고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옹이 진 나무에도 새들이 찾아오고, 바람과 별, 노을이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매일 슬프지 않았고 살아있는 오늘이 감사하다.




허림시인은 나의 필사 노트에 담긴 가장 많은 시의 주인이다. 강원도 홍천의 숲에 살며 지금까지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며 좋은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마중>이라는 가곡이었다. '팬텀싱어2'에서 한 참가자가 '마중'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가 너무 좋아 찾아보니 허림의 시에 윤학준 작곡가가 곡을 붙인 노래였다.

그 후 나는 허림 시인의 책들을 모조리 구해 읽었다. 도서관에서 빌릴 수 없으면 구입했고, 절판된 책들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수집했다. 운이 좋게도 친필 싸인이 담긴 책도 있어 뛸 듯이 기뻐하기도 했다.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말 한마디 그리운 저녁 얼굴 마주하고 앉아
그대 꿈 가만가만 들어주고 내 사랑 들려주며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 허림 <마중>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을 순수한 우리말과 서정적인 가사로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2022년 발매된 성악가 조수미님의 앨범에 타이틀곡으로 실리기도 했다.


만일 내가 결혼식에서 직접 축가를 부를 수 있었다면 주저 없이 이 곡을 선택했을 것이다. 연애할 때부터 지금까지 남편에게 여러 번 불러주다 보니 지금은 그도 가사를 모두 외워 함께 부르곤 한다.


<마중>이라는 곡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읊조리듯 담담하게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이 분을 강하게 힘을 주어 부르다가 마지막에 "꽃으로 서 있을게"를 아주 여리고 애틋하게 마무리한다. 그 부분이 한번 더 반복되면서 여운이 배가 된다.


이 시가 좋았던 이유는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하루 끝을 마무리할 수 있는 사랑. 화려하고 풍족하지 않아도 따뜻함이 있는 그런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왔다.


매년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이 곡을 찾아서 듣는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쌀쌀해진 거리를 지날 때에도 생각나는 노래다. 매번 시집을 들고 다닐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시를 노래로 들을 수 있으니 기쁘다. 언젠가 시인의 강연회에도 가고, 이 노래가 흐르는 연주회에도 가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춥고 시린 순간들을 따스하게 녹여주던 글이었다.






* 이성선

이성선 시인은 혼탁한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순수 서정의 자연 세계를 지속적으로 노래했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탐구하는 작품세계로 유명하다.

설악산의 능선이 잘 보이는 곳에서 태어난 시인은 '설악의 시인'이라고 불렸으며 1990년 한국시인협회상, 1994년 정지용문학상, 1996년‘시와 시학상’등 중요한 문학상을 수상했다.

강원도 고성시 토성면 성대리에는 시인을 추모하는 '이성선 시인의 길'이 있으며 현재는 추모 낭독회, 생활예술제 등을 통해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만날 수 있다.


* 허림

시인 허림은 홍천 출생으로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심상』 신인상으로 문학 활동을 해오고 있다. 시집으로 『골말 산지당돌 대장간에서 제누리 먹다』(달아실), 『누구도 모르는 저쪽』(달아실), 『엄마 냄새』(달아실), 『신갈나무 푸른 그림자가 지나간다』(현대시),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황금알 시인선), 『울퉁불퉁한 말』(시로여는세상), 『이끼, 푸른 문장을 읽다』(애지), 『말 주머니』(북인), 『거기. 내면』(시와 소금)이 있고 산문집으로 『보내지 않았는데 벌써 갔네』(달아실)가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A4동인, 표현시 동인, 홍천학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금은 내면 오막에서 살고 있다. (홍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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