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해지기 위한 크고 작은 노력은 생활 속 곳곳에 내재되어 있다. 현미잡곡과 채식 위주의 건강한 식사, 따뜻한 물 마시기, 녹즙 먹기, 각종 영양제를 챙기는 일, 꾸준히 운동하고 족욕이나 반신욕 등을 통해 체온을 올리는 일, 명상과 기도로 마음의 평화를 바라는 일 등등.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웃음치료'다.
폐 수술 이후 속초로 이주하게 되면서 나는 시내의 대형 서점에 들러 '암'과 관련된 거의 모든 책들을 섭렵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책을 읽고, 꼭 필요한 책은 구입하고 정보를 찾았다. 기수가 높은 말기 암에서 살아나신 분들과 자연치유로 암이 없어진 분의 이야기까지... '병원에서 해주는 표준 치료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추가적인 노력들이 더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루를 꼬박 앉아 무수한 책들을 독파하고 난 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기적은 있다."
생각보다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산속으로 들어가서 살았다는 사람,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밥을 최대한 꼭꼭 씹어 천천히 먹었다는 사람, 절실하게 종교에 매달렸다는 사람, 매일 2리터의 녹즙을 갈아 마셨다는 사람 등등 저마다의 특징은 있었지만, '꼭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과 이겨내고자 하는 굳은 의지 그리고 매사에 감사하는 긍정적인 마음'이 공통적이었다.
평소에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밥을 먹으면서 어깨춤을 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오래 씹어도 30분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웃음치료가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튜브 영상을 켜놓고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현타가 빨리 와서 꾸준히 하기가 힘들었다.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하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TV를 시청하면 될 것 같다고 스스로와 타협했고 웃음치료는 곧 잊혀졌다.
그날은 정기 검진이 있는 날이었다. 몇 달 전부터 숨 쉴 때마다 수술한 쪽 갈비뼈가 아프고 욱신거렸다. 보통 3주 이상 통증이 지속되면 병원으로 오라고 하는데 검진이 잡혀 있어서 그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찜찜한 마음으로 뼈스캔 검사*를 마쳤다. 주섬주섬 옷을 추스르고 내려와 신발을 신는데, 영상을 촬영해 주신 분이 검사한 사진을 보고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 혹시 어디가 안 좋나요?"
하고 물었지만, 다음 주에 외래 진료에 와서 확인하라는 대답뿐이었다.
안 그래도 몇 달 동안 수술 부위가 아파서 혹시나 했는데, 설마가 사실이 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검사실을 나와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엄마. 어디가 안 좋은가 봐. 검사해 주는 선생님이 다 찍은 영상 보고 한숨을 크게 쉬더니 다음 주에 주치의 만나서 얘기 들으래..."
폐는 예민하고 수술도 치료도 어려운 장기라고 했다. 수술한 지 몇 달 안 됐는데, 원래 이렇게 급속하게 안 좋아지는 건지 알 길이 없던 나는 새어 나오는 눈물을 꾹 참고 집으로 향했다.
그 후 담당 주치의를 만나러 가기 전 일주일 동안 먹먹한 마음으로 삶을 정리했다. 좋아한다는 말을 못 해 아쉬웠던 학창 시절 첫사랑을 찾아 연락했고, 장례식에 내가 좋아하는 동아리 사람들이 많이 와줬으면 하는 마음에 J선배를 나의 소식을 전할 사람으로 정해놓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라도 해보자 싶어 엄마와 둘이 웃음치료를 시작했다. 방음에 취약한 아파트에서 하기는 좀 민망해 야외로 나가기로 했다. 우리가 운동삼아 다니는 곳 중 그나마 사람이 없고 한산한 '설악산자생식물원'을 장소로 정했다.
추운 겨울. 엄마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 패딩을 걸쳐 입고 식물원으로 향했다. 매번 걷던 산책 코스에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나무로 된 데크가 나오고 벤치 몇 개가 놓여있었다. 울산바위가 빼꼼히 보이는 작은 쉼터다.
"엄마, 여기 사람 없다. 빨리 시작해."
나의 지시에 맞춰 우리는 가져온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크게 손뼉을 치며 웃음치료를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호호호호호. 하하하하하하."
우리는 허리를 앞뒤로 활처럼 구부렸다 피며 크게, 더 크게 박수를 쳤다. 그리고 단전 저 아래서부터 끌어올린 복식호흡으로 설악산이 떠나가라 웃어 젖혔다.
그러면서도 나의 눈동자는 계속해서 '누가 오나 안 오나.' 연신 주위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공공장소이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미친년' 소리 듣기 딱 좋은 광경이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우리는 자생식물원 안에서 장소만 조금씩 바꿔가며 웃고 또 웃었다. 웃다가 둘이 눈이 마주치면 민망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웃음 바이러스를 살포했다. 차도가 지나가는 길 쪽에서 웃으면 소음 때문에 더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어 요령도 생겼다.
나무 위에서 까치들이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도 웃기지? 그런데 할 수 없어. 이렇게 해서라도 나을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어.'
창피했지만 좋다는데 일단 살고 봐야지.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가기 전까지 매일같이 자가 웃음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인생을 정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맥을 놓지 않았던 나는 외래 진료가 있는 날에도 담담히 문을 열고 들어가 의사 앞에 앉았다.
"선생님, 저는 준비가 됐어요. 일주일 동안 삶을 정리하고 왔습니다.'
선생님은 안경을 한번 올리시더니 모니터를 보면서 이야기하셨다.
"삶을 왜 정리했지?"
"제가 몇 달 동안 수술한 쪽 갈비뼈가 아팠고, 숨 쉴 때마다 통증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난주에 뼈스캔 하면서 검사해 주시는 선생님께서 제 영상을 보시더니 심각하게 한숨을 쉬셨습니다. 결과는 오늘 들으라고 했어요."
"네가 죽을 만큼 안 아팠으니까 인생도 정리하고 그런 것 같은데. 뼈에 실금이 가긴 했는데, 나쁜 건 아닌 걸로 보여요. 폐 수술하면서 내시경이 들어가서 갈비뼈가 약해져 있을 수 있는데 약간 금이 갔네. 암이 전이되거나 다른 게 생긴 건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선생님은 편안하게 웃어주셨다. 병원에서 부처님의 미소를 볼 줄이야. 선생님 머리 뒤로 후광이 비췄다.
설악산을 울리던 엄마와 나의 웃음치료는 일주일 반짝하고 끝이 났다. 손뼉을 치며 온몸으로 웃으면 장기가 울리는 느낌과 함께 추운 겨울에도 땀이 날 정도로 몸이 데워졌지만, 연말이 되고 새해를 맞이하며 더 깊은 겨울로 갈수록 인적 드문 곳을 찾아 산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정식 웃음치료는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뇌는 우리가 억지로 웃을 때에도 실제로 웃는 것처럼 착각한다고 한다. 어차피 흘러가는 세월이라면 '잘 될 거라는 믿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는 데 시간을 쏟기로 했다.
나를 살리고 사랑했던 모든 노력들이 모여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물론 '아예 아프지 않았더라면. 재발 없이 깨끗하게 완치되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애석하게도 앞에서 말한 조건들이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한 나는 빠르게 모든 것을 수용하고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가끔씩은 인생이 준 십자가를 내가 덥석덥석 잘 받아들여서 계속 이런 시련이 오는가 싶기도 했다. '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준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서 죽는 순간까지 그 답을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모를 것 같다.
결국 그냥 사는 거다. 하루하루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365일 중 엄청 기쁘거나 엄청 슬픈 날은 단 며칠에 불과하다. 삶의 대부분의 날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저 그런 날들의 연속이다. 평범한 날들을 잘 보내는 사람이 삶을 잘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남편과 속초에 다녀오기로 했다. 우리는 늘 가던 식당에 들러 순두부를 먹고, 제철을 맞은 섭국도 먹기로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설악산자생식물원'에 들러 볼 생각이다. 아직 나무들이 마지막 잎새를 떨구지는 않았을 테니, 식물원에 살던 다람쥐는 잘 있는지. 연못 속 물고기들은 여전히 명랑한지. 엄마와 내가 웃음치료하던 곳에는 우리를 구경하던 새들이 아직도 둥지를 틀고 있는지... 오랜만에 가서 둘러보려 한다.
미시령 옛길을 돌아 속초로 들어가면 울산바위 아래 골짜기들이 더 깊숙이 눈에 들어온다. 온 산하에 울려 퍼지던 우리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웃기고슬픈소리다.
* 뼈스캔 검사[ bone scan ]: 뼈의 생리학적 변화와 해부학적 구조를 영상화하여 골절, 종양 발생 및 전이 여부, 감염 및 관절 질환의 범위와 중증도를 평가하는 핵의학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