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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Oct 15. 2024

가끔은 정신승리가 필요해




속초에서 치병생활을 하며

'와 여기 맨날 오면 진짜 건강해지겠다!' 싶은 곳이 두 군데 있었다.


영랑호와 설악산 비선대이다.


영랑호는 해안 사구가 발달되어 생긴 석호로 봄에는 벚꽃과 철쭉, 여름에는 영랑호 생태습지공원에 연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멀리 설악산에 쌓인 눈과 철새들을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영랑호를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주로 걷기, 뛰기, 드라이브, 자전거로 나눌 수 있다. 이중에서도 자전거로 영랑호를 가로지르는 일은 계절별로 달라지는 신선한 바람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코스다.


자전거는 영랑호 입구에서 대여도 가능한데 나는 운동 겸 자주 탈 생각으로 한 대 구입해서 라이딩을 즐겼다. 사실 바구니가 달린 귀여운 핑크 자전거라 '라이딩'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거창하지만 속초 똥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열심히 페달을 굴렸다.


평일의 한산한 영랑호 벚꽃길을 독차지하며 달리는 기분이란. 따뜻한 봄바람이 뺨을 스쳐가고, 벚꽃 잎이 흩어지는 장면은 영화처럼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현실은 백수에 내내 건강을 염려해야 하는 암환자였지만 여기서 매일 운동하며 좋은 에너지를 받으면 충분히 건강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므흣한 자신감마저 샘솟았다.





하나의 힐링 명소. 설악의 비선대는 어떠한가?


설악산 소공원을 들어가면 신흥사를 기준으로 오른쪽은 흔들바위와 울산바위, 왼쪽은 비선대로 가는 길이다. 이 구간은 비교적 완만하고, 거리도 짧은 초보자 코스여서 컨디션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자주 올랐다. 운이 좋으면 초입에서 청설모, 조금 더 산 깊숙이 들어가면 다람쥐도 만날 수 있다.

에메랄드빛 계곡을 끼고 조금만 걷다 보면 우뚝 선 설악의 비선대가 보인다. '비선대'의 명칭 자체가 '신선이 하늘로 올라간 곳'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아름다울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가공하지 않은 흙길을 밟으며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다리를 건너 안으로 안으로 향할수록 산 입구에 있었던 나무들과는 삼림의 밀도며 종류 그리고 공기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은 무장애 숲길을 만든다고 길을 새로 깔아 흙의 촉감을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땀 흘려 올라가 뒤를 돌아봤을 때 우뚝 솟은 비선대를 만나는 기분은 변함없이 상쾌하다.




암을 처음 만난 것은 만 스무 살 때였다. 얼마큼 무서운 병인지도 모르고 마냥 해맑게 치료받았던 것 같다. 스물아홉이 되던 해에 암이 다시 찾아왔고, 몇 번이고 수술과 치료를 반복해야만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해서 막 자리를 잡으려던 시기였는데, 회사를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오게 되니 친구들과는 정말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세상은 내 사정을 봐가면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힘든 와중에도 여러 가지 소식들이 날아들었다.

"취업을 했다, 대학원을 갔다, 유학을 갔다, 결혼을 했다, 아이를 낳았다, 승진을 했다, 집을 샀다, 차를 샀다..."


인생에 좋은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누린 거라고는 대학 입시와 취업. 그나마도 어렵게 들어간 회사는 아파서 그만뒀으니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우리 생에 가장 바쁘고 화려하게 꽃 피어야 하는 때에 병마와 계속 싸우고 있자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착하게 열심히 살아도 암은 또 찾아왔고, '다 지나간다.' 생각하며 버티고 이겨내도 그놈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영랑호에서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 도착한 문자도 그랬다.

꽤 오래 연락하지 않고 지냈던 지인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축하한다고 답장을 하고 다시 페달을 밟는데 지금까지의 신남과 감사함은 어디 가고

'나는 여기서 뭐 하고 있지?'

하는 현타가 왔다.


잠시 시무룩했지만 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정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서 이내 도리질 치며 스치는 생각들을 털어버렸다.

'그저 나는 남들보다 천천히 가고 있는 거라고. 달팽이도 거북이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하긴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게 제일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아무런 정체성도 소속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씩은 그냥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스스로 그렇게 마음먹고 나면 조금은 편안해졌다.


호수를 걷고 산을 오르고,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무던하게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워야만 했다.

손에 쥔 것도 별로 없는데, 계속 내려놓기만 하는 현실이 힘들었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아주 아주 천천히 인생을 꾸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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