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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Oct 15. 2024

동쪽마을 자연 수집가

동쪽 끝 작은 도시. 속초는 나의 전부였다.


아픈 몸을 치유하기 위해 내려간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반려자를 만났고, 자연이 주는 위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인생 그래프는 하향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더 아래로 곤두박질쳤지만 그곳에 있었기에 지금까지 잘 살아냈다고 확신한다.


스물아홉의 나는 '예쁜 서른 맞이 프로젝트'로 부지런을 떨고 있었다. 안정된 회사 생활과 퇴근 후에는 동호회 활동이나 악기, 뜨개질과 같은 취미를 익혔고, 직무 관련 수업을 수강하며 자기 계발에 힘썼다. 대부분의 청춘들처럼 사랑에 울고 웃었으며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꿈을 키웠다. 특별할 것 없지만 알차고 평온한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암이 재발했다.

암은 5년이면 완치인 줄 알았는데 8년 만에 도돌이표라니. 


모든 것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휴직계를 내고 수술과 치료가 이어졌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돌아갈 회사가 있다는 생각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몇 번이나 더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고, 폐 수술까지 받으면서 결국 사직서를 내고 서울살이도 모두 접어야 했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이사 갈 곳을 물색했. 서울에서 가깝고 자연이 좋으면서도 너무 낯설지 않은 곳.

강원도의 '속초'가 물망에 올랐다. 가족여행으로 자주 가서 익숙한 편이었고, 산과 바다, 호수와 온천을 품은 천혜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퇴원 후 정확히 한 달 뒤 엄마와 나의 속초살이가 시작되었다.




나의 주 무대는 <설악산>이었다.

속초로 내려간 얼마 후 항암치료를 시작 일주일에 세 번은 꼬박꼬박 흔들바위에 올랐다. 나의 경우 약을 맞고 집에만 있으면 오히려 몸과 마음이 늘어져 힘들었는데, 야외로 나가 맑은 공기도 맡고 꽃도 보고 바람도 쐬니 살 것 같았다.

다람쥐를 마주친 후로는 견과류를 가져나누어 먹곤 했다. 평생 다람쥐는 그때 설악산에서 다. 새끼 다람쥐와 다람쥐 굴, 다람쥐 울음소리 다양한 다람쥐의 생태를 관찰있어 동물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설악산은 사시사철 등산객들이 많아 낮에 혼자 산을 오르기에도 무섭거나 위험하지 않았다. 가끔씩 외국인 관광객, 가족단위 여행객들을 구경하는 소소한 재미도 있었다.


속초에 살면서 흔들바위 외에도 울산바위와 비선대, 금강굴, 토왕성 폭포와 비룡폭포 등에 올라보았다.

봄에는 목우재 터널의 벚꽃 길이, 여름에는 시원한 폭포의 물줄기가, 가을에는 오색 찬란한 단풍이, 겨울에는 경이로운 설악의 비경이 나의 빈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주었다.  



다음으로 자주 찾았던 곳은 역시 <바다>다. 

동해 바다만큼 가슴 탁 트이게 하는 장엄한 경치가 있을까. 파도가 밀려왔다 나갈 때마다 마음 묵은 때도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특히 자주 갔던 곳은 고성의 '아야진 해변'과 양양의 '정암 몽돌해변'이다. 속초에도 해수욕장과 항구가 있지만 인접 지역에 비해 해안선이 짧아 본격적인 바다 구경을 위해서는 7번 국도를 따라 고성이나 양양으로 가곤 했다.


아야진은 한적한 어촌 마을로 모퉁이를 돌면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해안선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곳이다. 바람이 거센 날에는 서서 달려오는 파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다.

정암 몽돌해변에서는 동그랗고 귀여운 몽돌이 내는 소리를 감상할 수 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나가면서 바닥을 쓸며 내려가는데, 그 과정에서 돌끼리 마찰하면서 경쾌한 소리를 낸다. 바람 좋은 날 이곳에서 파도에 부서지는 몽돌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전자기기 없이도 ASMR이 가능하다. '바다 멍', '물 멍', '돌 멍'을 한 번에 누릴 수 있는 정암 해변에서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은 요동 땅을 보고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장소'라는 뜻의 호곡장(好哭場) 론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좁은 나라에 살다가 하늘 아래 아무런 막힘없이 지평선과 맞닿는 광활한 공간을 보면서 엄마 뱃속에 갇혀 있다 세상에 처음 나온 갓난아이의 경험에 빗댄 것이다.


에게 호곡장은 바로 이 바다였다. 긴 치료로 힘들고 지쳤을 때, 삶이 답답하고 막막했을 때 한바탕 목 놓아 울기 좋은 곳으로 바다만큼 좋은 곳이 또 있을까?


속초에는 바다와 산 외에도 영동지방의 대표 석호인 <영랑호>와 <청초호>, 바다를 보며 삼림욕을 할 수 있는 <청대산 삼림욕장>, 설악산의 축소판이라는 <설악산자생식물원>, 등산 후의 피로를 풀어 줄 <척산온천 족욕공원> 등 자연이 주는 선물이 풍성하다.


도시 규모에 비해 볼거리도 먹거리도 많은 속초.

지금은 속초를 떠나왔지만 늘 내 마음속 우선순위인 곳.

좋은 명소들을 많이 다녀도 나에게는 가장 좋은 그곳.


나는 동쪽 마을 작은 도시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수집하며 인생의 가장 길고 어두웠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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