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혈액형을 묻지 않고 MBTI를 물어본다고 한다. 인간의 성격유형을 16가지로 나누어 놓은 검사인데 앞자리가 'E'인지 'I'인지에 따라 '외향형'과 내향형'으로 나누어진다. 검사를 해보나 마나 나는 'E'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수치가 무려 백퍼센트로 나와 내심 뜨악했던 적이 있다.
얼마 전 오래 알고 지낸 후배가 MBTI를 물어보았다. 'ENFJ'라고 말하며
"근데 E성향이 백 프로래."
라고 했더니 그녀가 말했다.
"언니! 그러면 속초에서 지낼 때 엄청 심심하셨겠어요."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왜 꼭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생각하니? 먹이 들고나가서 강아지 밥 주러 다니고, 고양이 먹이 주고, 설악산에 가서 다람쥐랑 놀고... 문만 열고 나가면 재밌는 게 얼마나 많다고."
우리 둘은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생각해 보면 대문자 'E' 성향 사람의 시골살이는 조금 단조로운 것이 사실이다. 나를 잘 아는 친구들도
"야, 너 거기서 심심하지? 막 서울 오고 싶지?"
하며 줄곧 내게 물음표를 날리곤 했었다.
사실 속초에 내려와서 심심하거나 다시 서울로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비슷한 또래에 이야기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속초는 인구자체가 많지 않았고 (2024년 기준 8만 명)가끔 보이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군인이거나 신혼부부였다. 하지만 나도 정기적으로 등산을 다니고, 해안가로 드라이브 가면서 여러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사람이 아닌 동물 친구들 말이다.
설악산에서 가장 많이 만났던 동물은 다람쥐였다. 집에 있는 견과류를 챙겨가서 잠시 쉬는 동안 다람쥐를 만나면 곁에 놔주곤 했다. 유명한 관광지여서 그런지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이리 오라고 손짓하면 폴짝폴짝 잘도 다가왔다.
한동안 다람쥐 먹이를 열심히 주다가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주최하는 '설악산 시민대학'에서 야생동물에게 함부로 먹이를 주면 안 된다고 배운 후에는 먹이 대신 사랑만 듬뿍 주고 있다.
속초의 항구와 바닷가 근처에는 낚시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항만 인근에 가면 고양이들이 많았는데, 특별히 나는 장사항 방파제에 사는 고양이와 친했다. 먹이를 먹고 나면 다시 방파제로 올라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이 퍽 로맨틱해서 '낭만 고양이'라고 이름도 붙여주었다. 속초는 어촌이라 잡은 물고기를 말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어서 고양이들에게도 천국이아니었을까 싶다.
고성의 백섬 해상전망대 가는 길에 묶여 있는 '미미'는 맞은편 횟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이다. 깡충깡충 얼마나 신명나게 뛰어오르는지 차를 타고 가는데도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예삐 주려고 바닷길 드라이브를 나설 때면 항상간식을 지참했기 때문에 미미에게도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사실 진짜 이름은 모르고 내 기준으로 '미미'처럼 생겨서 '미미'라고 불렀다.
속초에는 동물원이 없다. 근처에도 동물원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신 산으로 바다로 호수와 숲으로 가면 이렇게 많은 동물 친구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영랑호에서는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인 '저어새'가 노닐고, 또 다른 멸종위기종인 '삵'이 호숫가로 내려와 물 마시는 모습을 보며 신기해했다. 설악산 아래로 흐르는 쌍천에는 '고라니'가 뛰어다니고, 계절마다 다양한 철새들이 날아와 물가를 유영한다. 스포츠음료 색깔과 꼭 닮은 '물총새'도 여러 번 보았고, 사냥감을 노리는 '해오라기'와 나무집 짓기의 달인인 '딱따구리'도 만났다.
티브이와 책에서만 본 다양한 야생동물들이 이곳 속초에서는 팝업북을 펼치듯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튀어나왔다. 꼭 대화상대가 사람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